20년 전, 대학원 실험실에서 회전증발농축기가 돌아가는 걸 지켜보며 앉아 있었다. 약재로 쓰이는 천연물에 유기용매를 가해 녹아 나온 추출물을 넣고 돌리면 액체 성분이 증발하면서 농축된 상태로 실험용기에 달라 붙었다. 며칠 꼬박 돌려야 손톱 크기만큼 밖에 안 나오는 찐득찐득한 농축 추출물에 내 미래가 달려 있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극미량의 유효성분을 찾아내 화학구조를 분석한 다음 동물세포에 넣어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확인하는 연구였다. 2년 안에 의미 있는 결과가 나와 논문까지 써야 졸업이 가능했다.
재학 중 내내 졸업을 못하면 어쩌나 하는 압박감에 시달리면서 과학 실험이 같은 기기, 같은 방법을 쓰더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같은 재료, 같은 기구를 써도 요리사에 따라 음식 맛이 차이 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논리적으로 추론했던 것과 다른 데이터가 나오는 경우도 부지기수고, 데이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연구 방향이 달라질 때도 많다. 기기 조작법이나 실험 프로토콜이 어렵지 않더라도 숙련된 연구자가 아니면 단기간 내에 논문을 발표하기 쉽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시절의 연구 경험을 돌이켜보면,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딸이 외국어고등학교 2학년 때 단 2주간의 실험실 인턴십 과정으로 공식 학술지에 실린 연구논문에 제1저자로 이름을 올렸다는 점은 당최 납득하기 어렵다. “열심히 했다”거나 “영어로 작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만으론 논문의 제1저자가 되지 못한다. 풀리지 않는 실험과 논문을 붙잡고 미래를 걱정해본 젊은 연구자들의 분노에 그래서 공감한다.
조 후보자의 딸은 외고에 재학하면서도 의과대학 연구소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논문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의대 진학을 꿈꾸는 고교생에게는 천금 같은 기회지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열려 있지 않았다. ‘좋은 집안’의 자녀였기에 부모의 사적 인맥을 통해 대학 입시에 다른 학생들보다 유리한 ‘스펙’을 쌓을 수 있었다. 자녀의 미래를 위해 동원 가능한 인맥이 없어 미안해할 수밖에 없는 학부모들의 분노에도 그래서 깊이 공감한다.
최근 한 유명학원이 진행한 특목고 입시 설명회에 가본 적이 있다. 원장은 참석한 학부모들에게 자녀가 영재학교나 과학고에 가려면 입시 제출 서류인 학생부와 자기소개서를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리곤 팁을 친절히 일러줬다. 대회 수상이나 소논문, 연구보고서 같은 실적을 공식적으로는 기재하지 않도록 하는 추세이긴 하지만, 교사의 의견이나 평가 부분에 그런 실적을 ‘암시’하는 내용을 얼마든지 담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심사 때 눈에 띌 만한 남다른 활동 경력을 되도록 많이 만들어 놓으라고 원장은 조언했다.
교과 공부만 해도 시간에 쫓기는 학생들이 교외 활동까지 스스로 찾아보고 참여해서 면접관을 만족시킬 만한 결과를 얻어내는 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부모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서느냐에 따라 입시 서류의 질이 달라지게 된다. 원장의 설명을 듣는 동안 학부모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숨을 쉬었다. 원장은 웃으며, 정 남다를 게 없으면 교사들에게 인사라도 잘 하도록 지도하라고 했다. 고교 입시도 이럴진대, 대입은 오죽할까 싶었다. 집에 가서 초등학교 5학년인 아이에게 일렀다. 중학교 들어가면 선생님들께 지금보다 훨씬 더 인사 잘 해야 한다고.
딸의 진학 과정에 “절차적으로, 법적으로 하자가 없었다”는 조 후보자의 해명은 자녀에게 ‘하자 없는 꽃길’을 만들어줄 수 없는 평범한 부모들에게 다시 한번 절망을 안겼다. 심리학에선 인간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실을 왜곡하거나 외면하는 말과 행동을 하는 현상을 사회나 집단 안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본능이라고 본다. ‘행위자-관찰자 편향 효과’에 따른 현상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자신이 행위자 입장일 때와 관찰자 입장일 때, 즉 자기 일일 때와 남의 일일 때 원인과 배경 등을 다르게 해석하거나 이중잣대를 들이댄다는 얘기다.
아무리 본능이라 해도, 심리학적으로 설명된다 해도, 자녀의 입시와 진학 문제만 나오면 사사건건 불거지는 사회 지도층의 이중잣대는 ‘내로남불’과 다를 게 없다. 내 자식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 차라리 정직하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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