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사당이 폭탄 테러로 무너져 대통령과 주요 행정부 각료들까지 사망’했다. 죽은 대통령 을 대신해 무너진 정부를 수습해야 할, 살아남은 국무위원은 해임을 앞둔 박무진 환경부 장관 한 명. 도발적 상상으로 국가 재난의 상황을 펼친 tvN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에서 박 대통령 권한 대행을 연기한 지진희(48)는 ‘식물 대통령’의 좌충우돌을 실감 나게 연기했다.
박 대행은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뛰쳐나와 화장실에서 변기를 부여잡고 구토를 한다. 청와대에 입성해 새로 신은 구두는 자꾸 그의 발꿈치를 할퀸다. 지진희는 회가 거듭될수록 몸은 야위고, 얼굴색은 까맣게 변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취임 전과 후의 180도 다른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백척간두에 선 인물의 위기감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려 준비한 설정이었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취임 전엔 너무 밝고 건강했는데 취임 후엔 얼굴 살이 완전히 쪽 빠지고 머리가 하얗게 셌더라고요. 나라를 책임지는 일이 얼마나 큰 스트레스였으면 그랬겠어요. 드라마를 찍는 내내 체중을 줄였어요. 마지막 회 찍을 땐 바지 허리춤에 주먹 하나가 들어갈 정도였죠.” 드라마 종방 후인 22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지진희는 “얼굴색도 분장해 점점 까맣게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박 대행은 지난 20일 마지막 회에 이런 말을 한다. “시행착오는 겪게 되겠죠. 그 모든 과정을 우린 역사라고 부르지 않나요?” 드라마는 광장에 ‘100만 촛불’이 켜질 정도의 혼란을 딛고 새로운 출발선에 섰던 우리의 현실과 절묘하게 맞닿으며 공감대를 형성했다. 2016년 미국 ABC에서 첫 방송된 원작 ‘지정생존자’가 테러의 배후를 쫓는데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테러 후 정권을 이끄는 대통령의 주체성을 강조했다면, ‘60일, 지정생존자’는 한국적 해석으로 새 길을 갔다. 지도자의 성장통에 집중했고, 포용의 화두를 던졌다. 드라마 관계자들에 따르면 지진희는 지난해 ‘60일, 지정생존자’ 일부 대본을 읽은 뒤 바로 출연을 결정했다고 한다. 배우로서 “장르물에 대한 배고픔”이 커 욕심을 냈다. 드라마 ‘대장금’(2003)과 ‘애인 있어요’(2015), ‘미스티’(2018) 등에서 주로 멜로 연기를 선보여 새로운 모습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규칙을 강조하는 박 대행은 지진희와 닮았다. 지진희는 “야구와 농구 등 스포츠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규칙 안에서의 승부이기 때문”이라며 웃었다. 지진희는 장동건과 함께 연예인 야구단 플레이보이즈에서 활동했던 ‘야구광’이다. 그렇다고 꽉 막힌 사람은 아니다. ‘60일, 지정생존자’에서 같이 연기했던 이준혁은 “꼰대가 아닌 것”을 선배 지진희의 장점으로 꼽았다. 중학생 큰아들을 둔 지진희는 ‘키덜트족’이다. 중년 배우는 여전히 장난감 조립(레고)을 즐긴다.
미술학도였던 지진희는 광고회사에서 사진을 찍는 보조 작가로 일하다 서른이 다 돼 연기에 뛰어들었다. 드라마 ‘여비서’(2000)가 그의 첫 작품이었다. 20년 가까이 큰 흔들림 없이 배우 활동을 이어온 것은 “연기의 결핍”을 인정한 덕분이었다.
“문제는 늘 생기고, 슬럼프는 찾아오죠. 때론 (작품을) 거절당하기도 하고요. 스트레스를 다스리며 다시 준비하는 게 제 일이죠.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좋은 작품을 만날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기, 그래서 전 멜로 연기는 나이 들어서도 계속 하고 싶어요. 제 나이에 맞는 사랑이 있고, 그걸 보여주는 일도 필요하니까요.”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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