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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5월, 보고 들은 것만으로도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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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5월, 보고 들은 것만으로도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입력
2019.08.23 04:4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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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선옥 ‘은주의 영화’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최종 진압이 끝난 후 사망한 희생자들의 비참한 모습. 한국일보 기자가 촬영한 미공개 사진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최종 진압이 끝난 후 사망한 희생자들의 비참한 모습. 한국일보 기자가 촬영한 미공개 사진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사망자 165명. 행방불명자 166명. 부상 뒤 숨진 사람 101명. 부상자 3,139명. 구속 및 구금 등의 피해자 1,589명.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벌어진 민주화 운동으로 발생한 피해자 숫자다. 고도의 전투훈련을 받은 공수부대가 수많은 시민을 희생시킨 사건이자, 민주화 운동을 끔찍하게 탄압한 뼈아픈 역사 중 하나다. 증언은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새로 나오고 있고, 진상규명도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그러나 죽거나, 폭행당하거나 사라지지 않았다고 해서 ‘피해자’가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을까. 1980년 광주에서 벌어졌던 일을 보고 듣고 기억하는 것만으로 이후의 삶이 얼마나 바뀌게 되는지, 트라우마는 어떻게 질기게 살아남아 현재를 괴롭히는지 떠올린다면, 숫자로 집계되지 않은 피해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공선옥 작가가 13년 만에 내놓은 소설집 ‘은주의 영화’가 던지는 질문 역시 이와 같다. 2010년부터 2019년까지 발표한 작품 8편을 묶었다. 작가는 특유의 생생한 입말을 통해 야만의 시대가 남긴 상처가 아물었다고 해서 흉터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실감케 한다. 특히 표제작인 ‘은주의 영화’는 5ㆍ18의 아수라를 직접 통과한 당사자이자, 5ㆍ18과 관련한 소설을 꾸준하게 써왔던 작가의 화두가 여전히 5ㆍ18을 떠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소설이다.

공선옥 작가. 강경필 제공
공선옥 작가. 강경필 제공

주인공 은주는 영화감독이 꿈인 취업준비생이다. 5ㆍ18을 직접 겪지 않은, 서울 태생의 20대인 은주가 광주에 내려가 5ㆍ18 이후 다리를 절게 된 이모 상희의 사연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소설은 과거로 훌쩍 건너간다. 엄밀히 말하면 상희는 직접적인 신체적 폭력을 겪은 피해자는 아니다. 그러나 “시내에만 안 나가면 군인들이 사람들을 죽인 일은 우리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줄 알았”던 상희의 집에 군인들이 들이닥치고, 아무 이유 없이 닭과 개에게 총질을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상희는 “문을 열고 나가다가 우리 집 개가 총을 맞고 피를 뿜으며 죽어가는 것”과 “닭들이 살점이 너덜너덜한 채로 도망치는 것”을 목격한 이후, 충격으로 다리를 절게 된다.

그러나 상희는 피해자로 집계되지 않는다. 상희의 부모부터 “오일팔 피해자구먼, 피해자여”라는 주변 말에 “아따, 그런 말 하지들 마쑈. 저 아래 누구 집, 누구 집 해서 죽은 사람들이 얼매나 많은디. 우리 집 가시내는 직접적 피해를 입은 것도 없고 단지 달구새끼 때문에 충격을 좀 먹은 것을 가지고 무슨 피해자는 피해자여”라고 손을 내젓는다. 상희뿐 아니다. 금전적 보상이나 진상 규명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기억들이 상희를 비롯해 은주의 부모, 그리고 다른 이들의 현재에까지 불쑥불쑥 들이닥친다.

1989년 5월 10일 국보법 위반 혐의로 수배 중이던 조선대 학생 이철규가 온몸에 구타당한 흔적과 함께 변사체로 발견됐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광주 지역 학원 민주화 운동을 짓밟기 위한 공작이라고 발표했지만, 여전히 규명되지 않은 의문사로 남아있다. 오픈아카이브 제공
1989년 5월 10일 국보법 위반 혐의로 수배 중이던 조선대 학생 이철규가 온몸에 구타당한 흔적과 함께 변사체로 발견됐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광주 지역 학원 민주화 운동을 짓밟기 위한 공작이라고 발표했지만, 여전히 규명되지 않은 의문사로 남아있다. 오픈아카이브 제공

이모의 비극에서 출발한 카메라의 시선은 이모의 옆집 가게 주인인 선자에게로 향한다. 선자를 비춘 카메라는 1989년 죽은 그의 아들 박철규를 비췄다가, 종내 1989년 실제 있었던 조선대 학생 이철규의 의문사에까지 가 닿는다. 각자의 비극을 하나의 이야기로 꿰매며 소설은 결국 비극은 완벽하게 종결되지도, 별개로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책에는 이처럼 세대가 지나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는 비극을 그리는 작품들이 함께 담겼다.

공 작가는 22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TV프로에서 어르신들이 마치 카메라가 자식인 것처럼 얘기하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카메라가 과거의 무당, 영매 역할을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며 카메라를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는 영매로 설정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옛날은 내게 지금보다 훨씬 선명하다. ‘선명한 시간’은 어떤 식으로든 말을 해야지 안 그러면 사람이 시낭고낭(시난고난의 전라도 사투리) 앓게 되는 법이다.”


 은주의 영화 

 공선옥 지음 

 창비 발행ㆍ240쪽ㆍ1만 4,000원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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