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이놈도 드디어 바람에 등을 떠밀려 가는구나. 한 줄기 새벽바람에 눈을 떴다. 창문을 열고 잠이 들었나 보다. 이불을 슬며시 끌어당겼다. 자지러지게 울어대던 수매미도 힘이 빠졌구나. 7년 어두운 땅속에서 나와서 날개 달고 보름 동안 교미 한 번 하자고 목 놓아 암컷을 부르다 스러져 가고 마는 너. 그게 너의 고종명(考終命)이거늘. 오늘따라 쇠잔해진 울음소리가 처연하게 들린다.
여름 내내 수박과 포도와 복숭아를 달고 살았다. 과일 값도 장난이 아니니 조각으로 또는 알알이 해체해 비닐봉지에 담아서 냉장고에 넣어놓았다. 목구멍은 밤새 갈증에 시달렸다. 새벽에 선잠이 깨면 보드라운 햇사레 복숭아 한 입을 깨물고, 고창 수박 한 조각을 씹었다. 그래도 조갈이 나면 대부도 캠벨 포도 몇 알을 목구멍에 터뜨렸다. 순간 입안에 퍼지는 단물의 서늘한 카타르시스. 불면에 시달린 머릿속이 청량해진다. 과육의 소확행마저 허락되지 않았다면 나의 여름은 지치고 비루했을 게다.
‘주여, 지난여름은 위대했습니다… 들녘엔 바람을 풀어놓고…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분부해주소서’(릴케, ‘가을날’ 부분). 지금쯤 검푸른 바다 깊은 곳에는 전어와 고등어가 살에 기름을 올리며 그 누구의 밥상 안주를 위해 헤엄치고 있으리라. 개펄 바닥에서는 야들야들한 가을 주꾸미가 자라고, 어부들은 아이처럼 금어기(5.11~8.31) 해제를 기다린다.
여름내 냉기만 추종했던 내 미뢰(味蕾)도 이제 입맛을 다지고 있다. 어느 때부터인가. 계절은 사색하기도 전에 화급하게 하룻밤 사이에 가고 왔다. 아직 늦더위가 저만치에서 서성대지만 곧 환절기의 뼈마디가 욱신거리리라.
숙취의 혐의로 일찍 깬 새벽. 바람의 점성(粘性)이 다르다. 사위는 조용하고 머리는 명징하다. 혼자다. 야창에 문득 한 중년 남자가 서있다. 백주의 창은 나를 비추지 못했다. 저 몰골, 이게 자화상이구나. 그 민낯에 비밀과 욕망, 치욕과 가책, 허무와 조바심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촛불을 끄기라도 하듯 한 줄기 적막한 바람이 쉬익 스며든다.
이때다. 섬광처럼 뇌리를 스친 건지, 어디선가 들려온 건지 나는 모르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이 어스름한 개와 늑대의 시간에 청춘 이후 망각한, 이 짧지만 강렬한 시구(詩句)가 갑자기 튀어나와 창처럼 폐부를 찌를 줄이야.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1871~1945)의 난해한 장시 ‘해변의 묘지’ 마지막 연의 절창. 후대 시인들의 오마주. ‘살아야 한다’가 아니고 ‘살아야겠다’다. ‘산다’라는 동사 앞에 ‘tenter(try)’라는 동사가 더 있다. 원작의 의미에 충실하고자 ‘살려고 애써야 한다’로 번역한 것도 있지만 시 같지가 않다.
발레리는 생전에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으로 대우받았지만 영웅들의 안식처인 파리의 팡테옹에 묻히길 사양했다. 대신 지중해 파도와 해풍이 넘실대는 고향 남프랑스의 소읍 세트, 이 시를 잉태한 해변의 공동묘지에 영혼을 의탁했다.
삶이란 결국 바람의 성질인가? 미당 선생을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었고(시 ‘자화상’), 시인 도종환이 본 아름다운 꽃들은 다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으며 피었고(시 ‘흔들리며 피는 꽃’), 김수영 시인의 눈에는 바람이 불기 전 풀이 알고 더 빨리 누웠다(시 ‘풀’).
베란다로 나갔다. 바깥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큰 바람이 휘익 회초리처럼 얼굴을 때린다. 이 감미로운 고독. 그러나 이 부끄러운 신독((愼獨). 바람은 그 시원(始原)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인생도 단 한 차례 편도 티켓. 이 바람도 잦아들다 결국은 소멸될 터다. 너무나 쉬운 삶의 매뉴얼. 그래, 착하게 살아야겠다, 겸손하게 살아야겠다. 주저하지 말고. 하지만 객관식은 말고 주관식으로.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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