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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시민들, 지하철 운행저지 시위 대신 ‘청소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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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시민들, 지하철 운행저지 시위 대신 ‘청소 퍼포먼스’

입력
2019.08.19 17:40
수정
2019.08.20 00:08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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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차 최루탄’ 과잉진압 비판 의도, 시위 숨고르기 … 31일이 고비

19일 아침 홍콩 카오룽반도 삼수이포 지하철역에서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일회용 물티슈로 주변 안내지도 표지판을 닦으며 지난 11일 전동차 안에 최루탄을 쏜 경찰의 과잉진압에 항의하고 있다. 김광수 특파원
19일 아침 홍콩 카오룽반도 삼수이포 지하철역에서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일회용 물티슈로 주변 안내지도 표지판을 닦으며 지난 11일 전동차 안에 최루탄을 쏜 경찰의 과잉진압에 항의하고 있다. 김광수 특파원

“더러운 곳은 청소하면 되지만 시민들이 마음에 입은 상처는 어떻게 씻나요.”

19일 오전 8시 40분 홍콩 카오룽(九龍)반도 삼수이포(深水埗) 지하철역. 걸음을 재촉하는 직장인들 사이로 마스크를 쓴 남성 세 명, 여성 한 명이 들어섰다. 인터넷을 통해 만나 함께 왔다는 이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가방을 열더니 일회용 물티슈를 꺼냈다. 그리고는 각자 구역을 나눠 승차권 자동발매기를 닦기 시작했다. 이어 주변 약도가 그려진 지도를 비롯해 20여분간 묵묵히 역사 곳곳을 청소했다. 난생 처음 보는 특이한 ‘플래시몹(불특정 다수가 특정장소에서 짧은 시간 동안 약속된 행동을 한 뒤 흩어지는 것)’이었다.

나름의 소임을 마친 20대 청년 진(陳)씨는 “많은 시민이 이용하는 지하철은 건강과 직결되는 곳”이라며 “아직 남아있을 최루탄 가루를 말끔히 닦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11일 경찰이 다섯 정거장 떨어진 콰이퐁(葵芳)역에서 객차 안까지 쫓아와 승객들을 향해 최루탄을 쏜 과잉대응을 지적한 것이다. 이어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법을 개정하고 시민들에게 마스크를 나눠줘야 한다”고 호소했다. 정부와 경찰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겠다는 의미다. 이들이 훑고 지나가자 멋쩍게 지켜보던 청소원 두 명이 같은 곳을 다시 닦았다. 시민들은 자유의 숨결을 불어넣고, 정부는 공권력으로 막아내려는 홍콩의 현 상황이 집약된 퍼포먼스로 비쳤다.

범죄인 인도법(송환법)에 반대하는 홍콩 시위의 양상이 바뀌고 있다. 18일 170만명이 운집한 대규모 도심 집회는 주최측 공언대로 물리적 충돌 없이 끝났다. 물 흐르듯 한곳에 모였다가 사방으로 퍼져가며 시민들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무력진압을 부추겼던 인민일보, 환구시보 등 중국 관영 매체들조차 19일 “폭력 기조가 약화돼 시위가 안정세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했다. 물론 ‘색깔 혁명’, ‘서구의 선동’ 등 격한 용어가 여전했지만 당장 홍콩을 짓밟을 듯 선동하던 것에 비하면 톤이 한층 누그러졌다.

중국은 대신 홍콩의 독립을 종용하는 대만을 향해 화풀이했다. 중국 국무원 대만사무실은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이 ‘일부 홍콩인이 개별적으로 대만을 방문하도록 협조하겠다’고 밝힌 것을 두고 “홍콩의 법치를 파괴하고 홍콩에 개입하려는 것”이라며 “누구도 법률을 능가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친중 성향의 홍콩 매체 대공보는 “폭동죄로 기소된 피고인들이 죄다 법정에서 보석으로 풀려나고 있다”라며 “이렇게 처벌이 가벼우니까 폭도들이 날뛰는 것”이라고 트집을 잡았다.

당초 시위대는 19일 출근길 지하철 운행 저지에 나설 예정이었다. 정차한 열차 안에 들어가 시간을 끌며 비폭력으로 교통대란을 유발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전날 밤 11시 30분쯤 전동차 기관사 200여명이 돌연 19일 하루 집단휴가를 내겠다고 밝히면서 기류가 미묘해졌다. 굳이 시위대가 앞장설 필요가 사라진 것이다. 이날 오전 시위 장소로 지목된 삼수이포역 플랫폼에는 한국ㆍ홍콩 취재진 20여명과 사복경찰, 안전요원 등 40여명이 엉켜 2시간 가량 만일의 상황에 대비했지만 헛걸음만했다. 더구나 홍콩 지하철 기관사는 1,000명이 넘는 터라 일부 기관사들의 휴가는 지하철 운행에 전혀 타격을 입히지 못했고, 시민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지하철 쌩쌩 잘 달리는데 무슨 파업?”이라는 반응을 올리며 의아해했다.

모처럼의 평화로운 주말 시위를 거치면서 12주째로 접어든 홍콩 사태는 완연한 숨 고르기에 들어간 모양새다. 하지만 더 큰 고비가 남았다. 시위를 주도하는 민간인권진선(이하 민진)은 31일 결전을 치를 참이다. 당초 8월 일정에 없던 시위다. 민진 측은 “31일 도심 시위를 이미 경찰에 신고했다”라면서 “이때까지 정부가 5대 요구사항에 응답하지 않으면 시위 방식을 업그레이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송환법 철폐 △체포자 석방 △폭도 명칭 철회 △독립조사기구 설립 △보통선거 실시 등 시위대가 줄곧 요구해온 사항들에 정부가 얼마나 성의를 보이느냐에 따라 과거의 과격시위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엄포나 마찬가지다.

민진은 이번 주말인 24일에도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집회와 시위를 진행하고 거리에 설치된 지능형 카메라가 시민들의 사생활을 침해한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킬 예정이다. 18일 빅토리아 공원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에 주력하기 위해 주최측이 한 주 미룬 시위여서 징검다리 성격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홍콩 시민들은 18일 시위를 통해 비폭력의 위대한 힘을 확인했다. 이제 공은 다시 정부로 넘어갔다.

홍콩=김광수 특파원 rolling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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