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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는 국익 최우선… 지소미아 파기, 생각조차 안 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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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는 국익 최우선… 지소미아 파기, 생각조차 안 했을 것”

입력
2019.08.19 04:4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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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J 정부서 ‘김대중-오부치 선언’ 실무 맡았던 유의상 동아시아평화번영연구소장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 당시 외교부 동북아1과에서 실무를 맡았던 유의상 동아시아평화번영연구소장은 "김대중-오부치 선언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역사문제였지만, 김 전 대통령은 다른 분야의 협력 강화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한 실용주의 외교 전략을 취했다"고 평했다. 홍윤기 인턴기자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 당시 외교부 동북아1과에서 실무를 맡았던 유의상 동아시아평화번영연구소장은 "김대중-오부치 선언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역사문제였지만, 김 전 대통령은 다른 분야의 협력 강화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한 실용주의 외교 전략을 취했다"고 평했다. 홍윤기 인턴기자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외교정책은 일본에 관한 한 ‘실용주의’ 외교로 평가받고 있다. 한일 경제전쟁이 한창인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파격적인 조치들이 DJ 집권 시절 이뤄졌다. 물론 양국이 처한 환경은 질적으로 달라졌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한일 관계가 어려워질 때마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거론한다는 점이다.

DJ 취임 당시 외교통상부 동북아1과에서 실무를 맡고,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채택시 주일대사관 1등서기관이었던 유의상 동아시아평화번영연구소장은 16일 본보 인터뷰에서 김 전 대통령을 “과거는 과거이고 실용주의적인, 실리위주, 국익위주로 한일관계를 이끌어 가야 한다는 철학이 있었다”고 전했다. DJ의 외교정책에 “과거에 대한 일본의 반성을 중시하면서도 지난 일이 현재 한일관계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철학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당시에도 한일관계는 최악이었다. 유 소장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와 역사바로세우기, ‘일본 버르장머리’ 발언과 첫 독도방어훈련에 이르기까지 일본으로선 악재가 연달아 DJ의 대일 정책을 매우 걱정했다”며 “그러나 DJ가 의외로 일본에 너그러운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나라의 상황이 어려우니 일본과 잘 만나야 한다. 실리 위주의 한일관계를 이끌어야 한다는 국정철학이 있었다”고 한다. 그 철학은 취임 후 8개월 만인 1998년 10월 일본 국빈 방문이란 결과로 이어졌다. 이전에는 한국 대통령이 취임 후 일본에 국빈 방문하기까지는 2~3년이 걸렸는데, 일본으로서도 파격적으로 우호적 자세를 취한 것이다. 유 소장이 주일한국대사관으로 파견나간 그 해 3월까지만 해도 대통령의 일본 방문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었다고 한다.

 ◇DJ, 일본 도착 30분 전 ‘사죄’ 표현 합의 

DJ와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 총리가 채택한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은 양국 간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미래지향적 관계로 나가자며 과거사 인식을 포함한 11개 항을 담고 있다.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의 특별담화를 기초로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의 사죄”를 문서화 했다는 점이 가장 평가받는 대목이다. 유 이사장은 “대통령이 일본에 도착하기 30분 전에 극적으로 ‘오와비(おわび)’라는 단어를 ‘사죄’로 번역하기로 합의했다”며 “가장 극적으로 합의를 이룬 사안으로 당시 동북아과장이었던 박준우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강하게 관철시켰다”고 회고했다. 박 과장의 상대는 위안부 문제 해결 ‘사사에안’으로 유명한 사사에 겐이치로(이후 외무차관, 주미일본대사)였다. 무라야마 담화 때만 해도 ‘오와비’를 ‘사과’가 아닌 ‘사죄’로 쓴 건 우리의 임의번역이었는데, 처음으로 합의된 ‘사죄’ 표현이었다.

유 소장은 “김 전 대통령의 탁월한 능력뿐만 아니라, 친한 정서를 갖고 있던 오부치 총리라는 카운터파트, 그리고 양국 외교부 실무자들 간의 호흡이 잘 맞아 떨어져 공동선언이 나올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3, 4개월 전부터 실무자들이 시작한 물밑작업은 공동선언에 이어 경제ㆍ사회ㆍ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방대한 행동계획 채택으로 이어졌다.

유 소장은 상황이 달라진 지금 당시와 같은 공동선언이 나오긴 힘들 것이라고 인정했다. 과장급 실무협상이 그대로 윗선에서 수용되던 양측 외교당국의 위상도 크게 달라졌다고 그는 평가했다.

그럼에도 역사인식 문제와 현재를 분리해 실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DJ의 대일정책 철학이 현재 한일갈등에 주는 교훈은 적지 않다. 김대중 정부는 1998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생활안정지원금을 500만원에서 4,300만원으로 크게 올렸다.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을 압박하려는 취지였지만, 늘어난 3,800만원 중 3,150만원은 정부가 지급했다. 나머지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모금한 것이었다. 유 이사장은 “일본의 반성과 사죄에 대해 김 전 대통령은 ‘역지사지’ 입장을 취했고, 일본이 기여한 점은 기여로 평가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강제징용 피해자 우리정부가 우선 구제해야 

한일 경제전쟁은 지난해 우리 대법원에서 나온 강제동원 피해보상 판결에 대한 양국 입장 차이가 원인이다. 평행선을 달리는 두 입장을 조율하기 위해서 김 전 대통령 때와 같은 해결 방법을 고민해봐야 한다고 유 소장은 조언했다. 그는 “우리측이 명분을 만들어야 한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구제받지 못한 애매한 상황을 우리가 먼저 구제해야 한다”며 “일본 사람들은 또 한국정부가 해결했다고 해석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일본 측을 창피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로 들렸다. 유 소장은 “양국이 치고 받을수록 손해 보는 건 국민”이라며 “우리가 일본과 협력을 전혀 안 해도 되는지, 현명하게 판단하는 게 정치지도자들이 할 일”이라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 정부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파기를 압박 카드로 사용하는 데 대해 유 소장은 “김대중 대통령이었다면 지소미아 파기를 카드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지소미아는 우리가 일방적으로 베풀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서로 정보교환을 하며 도움을 주고받자고 만든 것이다. 경제와 안보는 다른 차원의 문제인데 지소미아 파기가 거론되는 게 유감스럽다”고 덧붙였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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