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저작권 한국일보]일러스트=김경진 기자

제가 다섯 살 무렵에 새어머니가 집으로 왔어요. 엄마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지 1년도 안돼 아빠가 재혼을 했어요. 새어머니는 이복동생을 가진 상태였어요. 새어머니는 집에 온 첫날부터 저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학대했어요.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자주 때렸어요. 눈을 가리고, 손을 뒤로 묶고 무차별적으로 때렸어요. 지금 같으면 아동학대로 신고할 정도였죠. 일곱 살 때 저를 벽에 세워두고 발로 차면서 ‘나는 너의 친엄마가 아니야’라고 소리치던 장면을 평소보다 일찍 귀가한 아빠가 봤어요. 그 길로 아빠는 저를 시골 할머니댁으로 보냈어요. 초등학교에 가면서 다시 집으로 왔지만, 방학 때는 할머니댁으로 피신했어요.

제가 점점 크면서 새어머니의 신체적 학대는 줄었어요. 겨드랑이나 허벅지를 꼬집거나 언어 폭력은 여전했지만 어렸을 때처럼 마구 때리지는 않았어요. 혼난 이유는 잘 기억 나지 않아요. 새어머니는 ‘넌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산다’ ‘말대꾸를 자주 한다’고 늘 그랬어요. 방에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거나, 행동이 조금만 느려도 혼났어요. 그 와중에도 저는 ‘내가 정말 새어머니의 친딸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새어머니를 닮아 똑똑하고 눈치가 빨랐다면 예쁨을 받았을텐데…’라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대학 졸업 후 서울의 한 공기업에 취직하면서 새어머니와 관계도 조금 나아졌어요. 새어머니는 저를 자랑스러워했고, 주변에서도 새어머니에게 수고했다고, 고생했다고 칭찬을 했어요. 저도 저를 키워준 새어머니에게 잘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서먹했던 아빠와도 대화하면서 ‘아빠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었구나’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러다 갑자기 아빠가 ‘미안하다’는 유서만 남긴 채 목숨을 끊으셨어요. 제가 집안의 가장이 됐어요. 새어머니는 대학생이었던 남동생과 함께 지내시겠다고 서울로 올라오셨고, 저는 회사 숙소에 머물면서 자주 들렀어요. 당연히 생활비도 많이 보탰어요.

괜찮은 듯 했지만, 직장에 다니면서 대인기피증이 심해졌어요.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저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너무 무서웠고, 사람 만나는 것도 힘들었어요. 그게 새어머니가 학대한 기억 때문인 것 같아 새어머니와 갈등을 풀려고 얘기를 했어요. ‘어렸을 적에 왜 그렇게 나에게 모질게 굴었나’ ‘나에게 욕도 하지 말고, 나를 깎아 내리는 비난도 멈춰달라’고 했어요. 새어머니는 훈육이었다며, 친자식처럼 생각해서 그런 거였다고 하더군요.

게티이미지뱅크

그 이후로 새어머니와 동생과도 연락을 끊었어요. 매달 생활비를 보냈는데, 새어머니는 다시 돌려보냈습니다. 처음에는 키워준 새어머니를 저버린 천하의 불효 막심한 자식이라고 비난 받을 두려움과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제가 아니면 가족들이 어떻게 살 지도 걱정됐고요. 연락이 끊긴 채로 최근에 저는 결혼했어요. 결혼식에 새어머니는 부르지 않았어요. 지금은 사랑하는 남편과 뱃속에 아이가 있습니다. 행복하지만 갑자기 과거에 학대 당한 장면이 또렷이 기억나고, 우울해집니다. 이 기억들이 언젠가는 나를 갉아먹고 나를 불행하게 하고, 태어날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 같아 불안해요. 새어머니와 다시 만나 어떻게든 사과를 받아야 할까요. 과거의 기억들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경아(가명ㆍ35ㆍ회사원)

경아씨, 사연을 읽고 학대했던 새어머니로부터 사랑을 갈구하는 당신의 절절함에 가슴이 무너지듯 아프고, 슬펐어요. 이미 고통스러웠던 과거는 지나갔는데도 당신이 여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만큼 과거의 무게가 너무 무겁고,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학대를 당했기 때문이에요. 저와 같은 의사와의 상담에서 가장 기본은 어릴 때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경험한 것이 그 이후 현재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있어요. 이 얘기는 어릴 때 힘들었던 경험 때문에 계속 당신이 힘들 거라는 뜻이 아니에요. 당신 내면의 갈등과 고통을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이를 건강하게 처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예요.

친어머니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때 어린 당신은 어땠을까요. 아마 어렸을 때여서 어떤 상황인지 몰랐을 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어머니가 들어왔지요. 당신을 가장 아끼고, 사랑해줬던 친어머니가 갑자기 안 보이고 낯선 사람이 당신을 돌보는, 중요한 사람이 됐어요. 그 상황을 이해할 새도 없이, 새어머니는 당신을 학대했어요. 그건 100% 학대였어요. 새어머니처럼 학대한 사람 대부분은 자신의 행동을 ‘훈육이었다’고 해요.

훈육이 뭘까요. 인간이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적 평화롭게 살아가려면 우리는 서로 지켜야 할 것들이 있어요.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안 해야 하고, 아무리 하고 싶어도 참아야 하고, 하기 싫어도 참고 해내야 하고, 서로 해하거나 공격하지 않고, 질서를 지키는 것들이죠. 이것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답게 하기 위해서예요. 인간다움을 지키는 것이 훈육이에요. 혼을 내는 게 훈육이라고 착각하기 쉬워요. 아니에요. 훈육은 아이에게 자기조절을 가르치는 첫 걸음이에요. 그래서 훈육은 부모가 하는 게 적절해요. 자식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부모여서, 부모가 자식에게 인간다움을 가르쳐줘야 하지요. 훈육을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해선 절대 안돼요. 부모의 가르침은 인간답게 하기 위한 것인데, 아이를 발로 밟고, 욕을 하고, 모욕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고귀함을 알려줄 순 없어요.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경아씨, 당신은 한 아이의 엄마가 될 거에요. 당신과 새어머니와의 관계는 화해하고, 갈등을 푸는 선을 이미 넘어가버렸어요. 당신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당신이 새어머니와 겪었던 부정적인 경험을 토대로 당신이 그렇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부당한 학대를 경험한 사람은 훈육에 대해 뚜렷한 개념을 꼭 갖고 있어야 해요. 훈육을 가장한 학대를 당했기 때문에 당신이 아이를 훈육할 때 혼란스럽고 헷갈릴 수 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위에 제가 설명한 것처럼 훈육이 무엇인지 잘 알면, 아이를 훈육할 때 혼란스러운 마음을 통제할 수 있어요.

새어머니를 용서하고, 갈등을 푸는 것은 이미 당신이 새어머니와 단절한 것으로 매듭지어졌어요. 스스로 그렇게 결정한 데 대해 저는 당신에게 ‘정말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싶어요. 새어머니와 연을 끊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에요.

게티이미지뱅크

과거와 단절하고도 당신이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한 데 대해 좀 더 살펴볼게요. 부모가 극단적 선택을 하면 대부분의 남은 자식들은 나이, 상황이 어떻든 간에 ‘부모의 인생에서 나는 별로 소중하지 않은 존재였다’라고 생각해요. 자식에 대한 사랑과 별개로 대부분이 우울증이 심해져서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인데, 자식들은 그렇게 받아들이기가 참 어려워요.

갑작스레 생긴 새어머니가 학대해도, 당신은 이 사람 옆에 어떻게든 붙어 있고 싶고, 아주 본능적이고 근원적으로 사랑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아주 실낱처럼 가냘픈 마음이 있었을 거에요. 학대하는 새어머니로부터 소중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싶은 마음이, 가뭄에 비 한 방울 기다리듯 아주 처절하고, 고통스럽게 당신 마음에 있었을 거에요. 아이들에게 어떤 조건과 상관없이 나를 소중한 사람으로 대해주는 사람, 세상 모두가 나를 못생겼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 네가 제일 예뻐’라고 해주는, 즉 부모로부터 받는 사랑은 본능적인 욕구에요. 이게 안 채워지면 결핍이 생기지요. 당신은 새어머니에게 그걸 채우기 위해서 무던히 애썼지만, 새어머니는 그런 사랑을 주질 않았어요.

이런 본능적인 의존적 욕구가 채워지지 못하면 많은 이들이 아주 사소한 일에도 부모나 주변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적개심을 보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당신은 학대한 새어머니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돌봐줬어요. 잘 지내려고 노력도 했어요. 물론 당신이 착하고 좋은 사람이기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새어머니를 돌봐주고, 보살피고, 그래서 ‘네가 우리집을 다 먹여 살리는구나’라며 칭찬을 듣고 싶은 것은, 당신의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충족해서 정서적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였을 거예요. 그러면서 두렵고 공포스러웠던 가해자인 새어머니보다 더 우위에서 당신이 그걸 통해서라도 안전해지고 싶었을 거예요. 지독하게 당신을 학대했던 새어머니 옆을 맴돌면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처럼 생활비까지 준 당신의 마음 저 깊은 곳에는 어린 아이같이 사랑 받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어서죠. 그런 당신의 모습이 저는 너무나 가엾고, 가슴이 미어지게 시렸어요.

경아씨,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고 당신은 얼마나 고독하고 힘들었을까요.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이제껏 충분히 넘치도록 노력했어요. 친부모든, 새부모든 원래 부모는 자식을 키우는 게 당연해요. 부모에게 은혜를 갚거나, 돈으로 환산해서 가치를 매길 필요가 없어요. 때로 요구하는 부모도 있지만, 그건 그 부모가 잘못된 겁니다. 아마 아이를 낳는 순간 제가 드리는 얘기가 무슨 뜻인지 알 거예요.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목숨을 내놔도 아깝지 않을 만큼 아이를 사랑하게 될 거예요.

당신은 인생에서 혹독한 대가를 치렀어요. 새어머니에게 느끼는 죄책감은 그가 당신에게 심어놓은 부적절한 죄책감이에요. 당신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어요. 거짓말을 한다고 새어머니가 때렸다고 했는데, 그건 당신이 새어머니가 때릴까 봐 한 거짓말이었겠지요. 그런데도 새어머니는 늘 당신이 잘못했다고 했을 거예요. 어른은 아이에게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쉽게 인정하질 않아요. 특히 학대하는 사람은 자신의 엉터리 기준으로 아이를 때려놓고, 훈육이라고 해요. 잘못했다고 하지 않아요. 어렸을 때 부모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식의 정당함과 타당함을 인정해주는 것, 이 경험이야말로 아이의 자존감을 높이는 최고의 방법이에요. 그런데 새어머니는 한번도 자신의 학대를 사과하지 않았고, 심지어 성인이 됐을 때도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런 그의 태도와 당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안됐던 무기력한 상황이 당신의 자존감을 무너트렸을 거예요.

그러니 새어머니와 더 이상 연락하지 마세요. 당신이 더 잘해서 새어머니가 바뀌거나, 사과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새어머니의 인생은 그 사람의 것이고, 당신 인생은 당신과 배우자와 아이의 것이에요. 학대한 당사자로부터 직접 사과를 들으면 좋았겠지만, 제가 어른으로서 대신 당신에게 사과하고, 당신의 아픔을 보듬어줄게요. 당신이 겪었을 고통과 아픔에 대해 어른으로서 너무 미안해요. 너무 상처가 많았을 거예요. 새어머니를 대신해 제가 가슴 깊이 그 상처를 끌어안을게요. 이제 한 아이의 엄마로서, 당신의 아이와 충분한 사랑을 나누기를 아주 간곡하게 당부합니다.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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