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한국영화 리얼리즘의 탄생 ‘오발탄’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은 한국영화 리얼리즘의 시효이자 고전기 한국영화의 대표적인 걸작 중 한 편으로 꼽힌다. 소설가 이범선의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전쟁 통에 월남해 해방촌 판잣집에 사는 실향민 일가족의 비참한 삶을 다룬다. 철호(김진규)는 계리사 사무소 서기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하지만 봉급만으로는 생계를 책임지기에 턱없이 모자란다. 본인은 치통에 시달리지만 돈 때문에 치과를 가지 못하고, 여동생 명숙(서애자)은 양공주로 몸을 팔며, 상이군인인 영호(최무룡)는 현실을 비관하다 못해 은행강도를 저지르다 경찰에 체포된다. 영양실조 상태이던 만삭의 아내(문정숙)는 아이를 낳다 죽고, 병원을 나선 철호는 치과에 들러 이를 뺀다. 택시 안에서 출혈의 고통에 의식을 잃어가면서 철호는 실성한 노모(노재신)의 평소 말버릇처럼 “(북한 고향으로) 가자”를 중얼거린다. 등장인물 일가족의 불행은 전후 한국사회의 비참한 현실을 그대로 투영한 것이었다. 멜로드라마나 코미디가 주종을 이루던 당시 한국영화계의 경향 가운데 ‘오발탄’은 전쟁의 상흔과 사회적 혼란을 정면으로 다룬, 유일하다시피 한 작품이었다.
“뭐랄까, 사회적 절망감, 방향상실, 목적상실이 팽배한 때였죠. 그 와중에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감이 있었어요. 세상을 향해 육성으로 외쳐야 했죠.”
시나리오 작가 이종기가 각색한 각본을 들고 찾아와 “이건 유 감독이나 해야 할 거요”라며 두고 간 것이 ‘오발탄’의 시작이었다. 초년의 유현목(1925~2009) 감독은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1955)에서 조감독으로 일하며 영화제작의 실무를 배웠고, 데뷔작 ‘교차로’(1956)로 언론으로부터 ‘정열적인 테크니시안’ 내지 ‘한국영화의 스토리텔링을 탈피하다’라는 호평을 듣고 있던 충무로의 유망주였다. 앞서 ‘구름은 흘러도’(1959)에서 광산촌에서 살아가는 4남매의 가난과 시련을 그린바 있던 그로서는 소재와 내용이 마음에 들었지만 각본 초안의 극적 완성도는 미흡하다고 보았다. 유 감독은 이이녕의 윤색을 한 번 거친 뒤 연극인 나소운과 함께 여관에 머물며 손수 각본의 최종고를 다듬었다. 영호의 조력자인 간호장교 설희나 은행강도를 돕다 배신하는 박 하사 등 소설에 없는 인물들은 이 과정에서 창조되었다. 그러나 ‘오발탄’의 제작 과정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일단 암울한 내용에 상업성이 부족해 보이는 영화를 만드는 데 선뜻 제작비를 출자해 줄 영화사나 제작자는 없었고, 영화는 시작하기도 전에 좌초할 위기에 처했다. 이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이 영화기술자협회장이자 이규환 감독의 친우였던 김성춘 조명감독이었다.
◇제작비 없어 1년 넘게 촬영
“망해도 좋으니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제대로 된 명작을 남기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며 제작자를 자처한 김성춘에게 유 감독은 ‘오발탄’의 각본을 내밀었다. 이에 김학성 촬영감독, 김진규, 최무룡, 문정숙, 윤일봉, 김혜정, 문혜란 등 당대의 쟁쟁한 배우들이 최저의 생계비만 받고 노 개런티로 대거 합류하게 된다. ‘오발탄’의 촬영에는 장장 13개월이 소요되었다. 감독 한 사람이 한 해에 4~5편을 뽑아내곤 했던 당시로선 매우 드문 경우였다. 이는 영화의 내러티브만이 아니라 카메라의 앵글, 사운드와 이미지의 충돌, 과감한 몽타주 편집 등 기술적인 정교함에도 심혈을 기울였던 유 감독의 완벽주의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제작비 탓이기도 했다. “이틀 찍고 열흘 쉬고, 필름 값이 좀 생기면 또 며칠 찍고” 지방흥행업자의 투자를 기대할 수 없었던 탓에 자금을 조달해오면 촬영을 진행하고 돈이 바닥나면 쉬었다가 다시 재개하는 식이었다. 비슷한 시기 신상옥 감독이 신필름을 설립해 안정적인 산업 시스템을 정립해 가던 것과는 반대로 유 감독은 충무로의 바깥에서 철저한 인디펜던트의 방식으로 ‘오발탄’을 작업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대표작이긴 하지만 1년 걸려서 너무나 고통스럽게 만들었어요. 물론 그때의 사회적 고통도 포함이 되겠지만 작품을 꼭 끝내야 한다는 개인적인 고통이 영화에 스며들어서 나타난 것 같아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당시에 제작할 돈이 없어서 애를 먹었어요. 어쩌면 그때 재정적인 압박을 받던 체질적인 생리가 창조한 영화라고 볼 수도 있죠.”
배우와 스태프 모두 우동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우는 넉넉지 못한 사정이었지만, 영화에 임하는 태도는 실로 비장한 것이었다. ‘오발탄’의 장면들을 자세히 보면 종종 배우들의 입김을 관찰할 수 있는데, 극 중 계절인 늦봄에 맞춰 옷을 차려입었지만 실은 겨울에 촬영해야 했던 배우들의 고생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노모 역의 노재신은 비슷한 정신병 증세의 환자가 있는 병원을 찾아가 행동을 관찰하고는 이를 연기에 반영했는데 현장에서 이를 지켜보던 스태프들이 보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영호가 은행강도를 하는 장면은 로케이션으로 점찍어둔 은행의 반대에 부딪쳐 촬영이 무산될 뻔했는데 유 감독은 은행 강탈 과정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대신 은행 밖 거리로 기독교 전도행렬이 지나가는 장면으로 대체하는 임기응변을 발휘했고, 이는 표현적으로 도리어 전화위복이 되었다. 신세계 백화점 밖에서의 야간 촬영 때는 근처의 건달들이 돈을 뜯으려 촬영을 방해했는데, 건달이 몸으로 카메라를 가리는 지경까지 가자 참다 못한 유 감독이 주먹을 날려 한 명을 때려눕히고 기세를 압도해 쫓아냈다. 건달들의 보복을 두려워한 스태프들이 자리를 피하자고 했지만 유 감독은 묵묵히 자리를 지켰고 그 날의 촬영을 마쳤다.
◇때마침 무너진 이승만 정권
중단과 재개를 거듭하고 자금에 허덕이며 찍었지만, ‘오발탄’의 지지부진한 작업 진척은 결과적으로 득이 되었다. 유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자유당 정권 시기는 “빈민촌의 초라한 판잣집이 나오면 나라망신이라 삭제하고, 멀리 경무대가 보인다고, 엑스트라의 치마가 짧다고, 제기랄이란 말도 자르던”(‘한국영화회고록’ 씨네 21 2000년 12월 19일) 식으로 공보부의 영화담당이 갖가지 기발한 이유를 들어가며 가위질의 횡포가 만연하던 때였다. 그러던 와중에 4ㆍ19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다. 이를 기화로 삼아 유 감독은 각본을 본래 의도에 가깝게 고치는가 하면 없었던 장면을 추가하기도 했다. 영호가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청계천 수로를 따라 도망치는 장면은 본래 각본에 없었던 장면 중 하나로 할리우드 갱스터 장르의 영향이 엿보인다. 이 장면의 말미에는 기둥에 목을 매 자살한 여인의 시체와 그 등에 업힌 아기가 울고 있는 모습이 배경에 깔려 있다. 당시 한국사회를 바라보던 작가 유 감독의 절망감을 절절히 웅변하는 대목이다.
고난 끝에 완성된 ‘오발탄’은 1961년 4월 13일 개봉했다. 유 감독은 훗날 인터뷰에서 개봉 당시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충무로 일대에서는 영화를 관람한 후 집에 들어가지 않고 삼삼오오 다방으로 모여 영화에 대해 밤늦도록 이야기하며 서성거리는 20~30대 가장들이 많았다. 자신의 이야기가 영화에 나와서 도저히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치를 고난은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었다. 그해 7월 17일 재상영에 들어간 ‘오발탄’은 5ㆍ16 군사정변으로 들어선 군사정권의 압력으로 상영금지 조치를 당하고 만다. 한국사회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극 중 노모가 “가자”고 하는 걸 두고 북한을 옹호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걸로 트집을 잡힌 것이다.
‘오발탄’이 복권된 건 그로부터 2년 뒤인 1963년의 일이었다. ‘오발탄’의 미학적 완성도와 철학적 깊이에 매혹된 남캘리포니아대(USC) 영화과 교수 리처드 맥캔은 미 국무성 영화제작소 고문 자격으로 몸소 공보부를 설득하는 한편, 그해 10월 제7회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 ‘오발탄’이 초청되도록 주선하면서 상영금지령이 풀리게 된다. “그동안 줄곧 예술 작품으로써 높이 평가돼 온 반면, 미국으로부터의 수입 희망도 있고 해서”라는 명목이었다. 이때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 출품된 상영본이 오늘날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오발탄’의 유일한 필름이 되었다. 비록 네거티브 필름 원판은 소실되었지만, 영어자막이 붙은 이 상영본이 기초가 되어 2016년 한국영상자료원에 의한 디지털 복원이 이뤄지면서 ‘오발탄’은 55년 만에 원형을 회복하게 되었다. 시대의 고통 속에 달구어진 걸작의 귀환이었다.
조재휘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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