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아니다. 2017년 1월부터 2년 간 우리 사법부의 중심에서 벌어졌던 사법농단의 실체를 사실에 근거해 써 내려간 책이다. 그런데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박진감과 긴장감이 전반에 흐른다. ‘정의의 편에서 진실을 가린다고 믿었던 법관들이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라는 충격 때문일 테다.
29년 기자로 일하는 동안 법조를 오래 출입한 권석천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법원의 내부자들을 취재하고 근거 자료를 확보해 썼다. 그 중심에는 사법농단의 최초 저항자 이탄희 전 판사가 있다. 이 전 판사는 2017년 1월 주류법관 양성소이자, 승진 코스로 여겨졌던 법원행정처의 기획조정실 기획2심의관으로 발령 받고 그간 이뤄져 온 법관 뒷조사와 재판 거래의 실태를 직면한다. 법관과 법원의 독립을 정면으로 침해하는 일이었다. 2017년 2월 사표를 냈다가 철회했지만 이 사실이 보도되면서 사법농단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졌다. 올해 2월 법복을 벗은 그는 5월부터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책의 큰 줄기는 저자인 권 논설위원이 이 변호사를 인터뷰한 기록이다. 두 사람은 한 번에 두 시간씩 10회에 걸쳐 만나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20여시간에 걸친 인터뷰가 바탕이니 대담집으로 쓸 수도 있었지만, 저자는 인터뷰를 기반으로 한 추적기로 방향을 잡았다. 저자는 “자신이 겪은 일들을 바로 어제 일처럼 떠올리는 이 전 판사의 기억력과 그의 생각에 놀랐다”고 밝혔다. 덕분에 책에는 이 전 판사가 법원행정처의 핵심 인물들이나 선ㆍ후배 법관들과 나눈 대화, 당시의 분위기, 표정, 말투, 그들이 썼던 인상적인 단어까지 생생하게 녹아 있다.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발령받은 뒤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어렴풋이 알게 된 이 전 판사가 함께 근무한 적이 있는 선배 법관을 만나 나눈 대화가 한 예다. 이 전 판사가 “윗분들에게 예쁨받고 싶은 욕심이 없다”며 고민을 드러내자 선배는 “넌 아직 모르는구나? 살기 위해서 그러는 거야, 살기 위해서”라고 답했다는 일화다. ‘살기 위해서’라는 말을 반복했다는 대목에서 심의관으로 일했던 법관들의 심리를 짐작하게 한다.
이 전 판사의 저항에 집요한 회유로 응수한 이들 중에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처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도 있으나, 이 전 판사가 믿고 따랐던 K 부장판사 같은 익명의 법관도 있다. 그들이 준 사람에 대한 실망은 이 전 판사에게 남은 또 다른 상처다. 그러나 이 전 판사는 “2년의 싸움에서 살아남았고 더 성장했다”며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책은 사법농단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인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도 심층적으로 다룬다. 법원행정처가 대법원의 판결로 일본 기업들이 내야 할 배상금 규모가 커지면 국가에 손해이고 그렇기에 보상액을 줄일 방안까지 고민한 사건이다. 이를 언급하며 저자는 과연 국가란, 국익이란 무엇이냐고 묻는다. 법원의 주인은 주권자인 시민임을 망각하고 대법원장을 주인으로 모시고 움직인 법관들을 겨냥한 물음이다. 동시에 지명 직후 천명한 사법부 개혁을 주춤하고 있는 김명수 대법원장에게도 향하는 질문이다.
저자는 “제왕적 대법원장제를 수술하고 판사들이 사법행정의 관료가 되는 통로를 차단해 시민들에게 닫힌 법원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정한 재판을 받는 것은 과도한 요구가 아니다. 그저 평범한 삶의 조건이다.”
“현재를 철저히 비관할 수 있어야 미래를 낙관할 수 있다”는 저자의 에필로그는 법원의 두 얼굴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이 책을 쓴 이유다.
두 얼굴의 법원
권석천 지음
창비 발행ㆍ420쪽ㆍ1만8,000원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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