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 전문가 긴급진단] 이수훈 전 주일대사
과거사 문제 피해자와 소통 없이 어물쩍 봉합하는 건 불가능
“외교적 해법 모색을 어렵게 만드는 건 일제 징용 기업과 피해자 간 대화를 막고 있는 일본 정부다.”
이수훈(65) 전 주일(駐日) 한국대사는 ‘경제 전쟁’으로까지 번진 한일 갈등이 해결되려면 무엇보다 일본 정부의 태도 전향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지난 12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다. 이 전 대사는 “피해자와의 소통이나 국민적인 합의 없이 한일 과거사 문제를 정부 간에 두루뭉술하게 봉합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못박았다.
이달 초 일본 각의(閣議)를 통과한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 우대국) 한국 제외’ 결정은 유야무야 되도록 양국이 타협하는 게 현실적 출구라고 이 전 대사는 조언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입장에서 실제 거둬들이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크다는 이유에서다.
이 전 대사는 15일 본보와의 추가 전화통화에서 이날 문재인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와 관련해 “공격적이기보다는 보편적 가치에 호소하는 극일(克日) 메시지가 나왔다”며 “외교 해법 도출 여부와 시기 등은 일본의 태도에 달렸다”고 촉구했다.
_문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를 평가한다면.
“우리 국민의 성숙한 의식으로 일본 국민의 협력을 견인해내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긍정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통해 일본을 이겨내자는 극일 메시지가 담겼다. 공격적이거나 반일적이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일본이 전향적이고 유연하게 나와야 한다. 그래야 외교적 해법이 마련될 수 있다.”
_애초 아베 총리 의도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지는 않은 듯하지만 여기에 편승하는 것 같은 정부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 없지 않다.
“문 대통령은 반일주의자가 아니다. 그럴 이유가 없다. 반대로 일본과 협력해야 하는 이유는 많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프로세스를 진전시키려면 일본과의 협력이 중요하다. 예견된 일인데도 정부가 시간을 질질 끈 것 아니냐는 지적은 적절하지 않다. 이 상황을 만든 건 우리 정부가 아니다. 아베 정부다. 왜 이렇게 됐냐고 물으려면 아베 정부에게 따져야 한다. 지금은 경제 전쟁 상황이다. 전쟁을 치르려면 단합해야 한다. 내부 분열은 소모적이다.”
_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ㆍ지소미아) 파기는 쓸 만한 카드인가.
“전략물자를 북한에 밀반출할 가능성이 있으니 우리를 믿지 못하겠다는 게 일본 얘기다. 불신하는 상대와 어떻게 민감한 대북 군사 정보를 공유할 수 있나.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잣대는 유용성이다. 일본은 유용성을 평가한 것 같다. 한미일 삼각 안보 협력도 고려해야 한다. 정부가 고민이 깊을 거다.”
_최근 일본 측에서 미국이 전후 질서의 토대가 된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전쟁 청구권 포기 원칙이 흔들릴 것을 우려해 일본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요즘 동북아 정세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행보를 볼 때 노골적인 지지 표명은 불가능하다. 기대해서도 안 된다.”
_갈등이 봉합되기를 바라는 미국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더 호전적인 쪽이 싫지 않겠나. 그게 우리가 될 수도 있다.
“한일 정부 모두 이 사태의 장기화를 원하지 않는다. 아베 정부도 상당한 부담을 갖고 있다. 적절한 타이밍이 되면 출구를 만들어 빠져나가려 할 거다. 전쟁이 막 시작됐기 때문에 한국 정부는 강경하다. 조치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아베 총리의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크다. 현실적으로 각의에서 결정된 조치의 철회를 기대하기 어렵다. 가장 바람직한 출구는 일본이 시행을 ‘솜방망이’ 식으로 하는 거다. 방법이 없지 않다. 그 길로 가고 우리 정부가 긍정적으로 해석할 경우 징용 피해 배상 판결 문제에 대한 한국의 자세도 달라질 수 있다.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_징용 판결 분쟁 해결을 위해 6월 한국 정부가 제안한 ‘1+1’안(한일 기업 출연금으로 위자료 지급)이 일본 정부에게 거부 당하지 않았나.
“기업에만 맡기지 말고 한국 정부가 나서서 배상에 참여하라는 게 일본 정부 요구인데, 우리 정부가 함부로 나설 수 없다. 정부가 나서려면 피해자와 국민의 동일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 대법원 판결 어디에도 정부가 나서서 피해자를 구제하라는 주문이 없다. 정부가 가진 레버리지(지렛대)가 아주 작은 것이다. 도리어 해결을 막고 있는 건 일본 정부다. 자국 기업이 징용 피해자의 대화 요구에 응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자산 압류 결정문을 징용 기업에 송달하지 않고 반송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그런 태도로는 외교적 해법을 만들기 어렵다. 우리 정부에 양보를 요구할 자격이 없다. 한국 정부의 ‘1+1’안에는 화해가 함축돼 있다. 민사 소송에 따른 사법 절차가 진행 중이다. 화해를 일본 정부가 방해해서는 안 된다.”
_경제 전쟁까지 벌일 정도로 과거사 청산이 일본에게는 껄끄럽다. 일본과의 협력이 긴요하다면 우회하는 방법은 없을까.
“김대중 대통령이 투 트랙 대일 외교(과거사 처리와 미래지향적 협력의 분리) 원칙을 세웠을 때 햇볕 정책을 위해 일본 협조가 필요하기는 했지만 무한정 일본에 유화적이어야 한다는 취지는 아니었다. 1998년 일본 의회 연설에 ‘과거사 직시’가 명시돼 있다. 피해자와의 긴밀한 소통이나 그분들 동의 없이 정부끼리 과거사를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된다. 끝내 사달이 난 박근혜 정부 당시 일본군 위안부 합의가 반면교사다. 과거사를 제대로 따지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다.”
◆이수훈 전 대사는
문재인 정부 첫 주일 한국대사다. 1년 6개월간의 주일대사 재임 기간 동안 위안부 합의 검증과 한국 대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 등 한일관계를 크게 흔든 일들을 겪었다. 2005년 대통령자문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공동체 구상’을 설파했고 문재인 대통령 당선 뒤 인수위원회 역할을 한 국정기획자문위의 외교안보분과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부산대 영어영문학과를 나와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김정원 기자 garden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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