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 한국일보]6일 오후 서울 중구 세종대로 일대에서 중구청 관계자들이 일본이 수출우대국(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한 것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설치한 ‘노 재팬’ 깃발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이를 다시 내리고 있다. 홍윤기 인턴기자

과거 보수 정치권은 선거 때마다 판세에 영향을 미치는 북한 변수를 이용한 이른바 북풍(北風) 카드를 자주 꺼내 들었다. 북풍 정치는 초창기 제법 재미를 보기도 했다. 노태우 김영삼 두 대통령의 당선에 KAL기 폭파범 김현희의 압송과 거물간첩 이선실 사건 등이 일정 부분 도움을 줬다는 게 정설이다. 물론 시간이 갈수록 약발은 무뎌졌다. 시대적 상황이 변하기도 했지만, 더 이상 양치기 소년에 속지 않겠다는 유권자의 자각이 컸을 게다.

북풍은 이후 다양한 형태로 변주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망명을 일컫는 황풍(黃風), 판문점 총격 요청사건을 뜻하는 총풍(銃風), 정치인의 성을 딴 안풍(安風), 경제위기론을 의미하는 경풍(經風) 등 온갖 파생어가 탄생했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일풍(日風)이 단연 화제다. 우리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 여기에 우리 정부의 대응이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화이트리스트 경제보복에 나선 것을 두고 정치권에서 내년 총선에 미칠 영향을 저울질하고 있다. 내년 총선에서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거라는 내용을 담은 더불어민주당 싱크탱크 민주연구원의 ‘한일갈등에 관한 여론 동향’ 문건은 일풍의 대표적 사례다.

일풍을 정치에 활용한 것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먼저다. 2012년 8월 10일 이 전 대통령이 현직 국가원수로는 처음 독도를 전격 방문하자, 당시 20%였던 지지율은 금세 26%까지 상승했다. 덕분에 힘겨운 레임덕을 넘겼으니 확실히 효과를 본 셈이다.

북풍이 그랬듯, 일풍이 당사자에게 결코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이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아주 짧은 기간 지지율 상승이라는 효과를 보았지만, 반대로 일본의 보수 우익 세력을 자극했다. 한달 뒤 열린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우익성향이 강한 당시 아베 전 총리가 급부상하게 된 것도 이 때였다. 아베는 자민당 총재에 당선된 이후 3달뒤 치러진 총선(일본은 총선 다수당의 총재가 총리로 선출되는 것이 일반적이다)에서 당을 압승으로 이끌며 총리로 재등장했고, 이제 역대 최장수 총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미 한차례 총리를 역임하다 중도 사퇴, 실패한 정치인으로 낙인 찍혔던 아베의 화려한 귀환 배경에 이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아베 총리가 이 전 대통령에게 감사의 인사라도 전해야 하는 건 아닌지…

최근 여당 정치인들이 일본에 퍼붓는 언사가 예사롭지 않다. 전쟁을 연상케 하는 죽창가, 의병이 등장하더니 기어이 일본을 ‘네살짜리 응석받이 어린 애’라며 다그쳤다. 상당수가 자극적이고 일부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사이다 발언이라며 응원하는 이도 있는 만큼 일시적 지지율 상승에 조금은 도움이 될 지 모른다. 하지만 동일한 유권자를 상대로 표싸움을 하는 여야간 정쟁과 외교는 엄연히 다르다. 아베 총리가 아닌 전 일본을 표적으로 삼는 듯한 정제되지 않고 정교하지 못한 발언은 상대국 국민 감정을 자극,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당장 일본 국회의 구성을 봐도 그렇다. 아베 총리 집권 6년여만에 중의원은 개헌의석을 이미 확보했고, 최근 치러진 참의원 선거 결과 개헌 가능 의석에 근접해있다. 평화헌법을 지키려는 일본 국민의 의식이 지금은 우세하다. 하지만 우리 정치인의 시대착오적인 발언이나 행동이 지속될 경우 일본 정치권과 국민을 자극해 전쟁 가능한 나라로 이끄는 길을 열어주는 터무니 없는 결과를 초래할 지도 모른다.

다행인 건 우리 국민이 그렇게 녹록지 않다는 사실이다. 촛불로 정권을 바꾼 시민들은 최근 서울 중구의 노 재팬 깃발 자진 철거를 이끌어낼 정도로 성숙해졌다. 정치가 민간 영역을 침해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겠다는 이 메시지는 내년 총선에서 일풍이 결코 유리하게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정치권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기도 하다.

한창만 지역사회부장 cm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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