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박자박 소읍탐방]천안 목천읍 독립기념관과 병천면 유관순열사사적지
천안 목천읍 독립기념관의 상징 ‘겨레의 집’. 수덕사 대웅전을 본 떠 지은 동양 최대의 기와지붕 건물이다. 천안=최흥수 기자

되도록 비장하지 않으려 했다. ‘교육’이라는 단어는 머릿속에서 지우고 가볍게 돌아보려 했다. 여행의 본래 목적인 비우고 쉬는 것에 충실하자고 마음먹었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 못했다. 100년 전 독립의 염원이 8월의 폭염보다 뜨겁게 온몸을 데웠다. 천안 목천읍 독립기념관과 병천면 유관순 열사 사적지를 다녀왔다.

◇한마디 한마디에 울컥…독립기념관 ‘어록길’

독립기념관은 1987년 8월 15일 개관했다. 광복을 맞이한 지 42년이 지난 시점이니 많이 늦었다. 1982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사건을 계기로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상징하는 기념관 건립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전 국민적 성금 모금과 자료 기증으로 마침내 5년 후 광복절에 역사적인 개관을 하게 된다.

독립기념관 ‘겨레의 탑’과 ‘겨레의 집’.
‘겨레의 탑’ 정면에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다. 양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모양의 두 탑신 사이로 독립기념관의 상징 ‘겨레의 집’이 보인다.

목천읍 흑성산(495m) 남동쪽 구릉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독립기념관은 한두 시간에 둘러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서울 여의도보다 넓은 394만㎡ 부지에 6개 상설전시장과 야외 전시시설을 갖추고 있어 꼼꼼하게 보려면 하루로도 부족하다. 종합안내소인 ‘겨레 마루’에서 상징적 건물인 ‘겨레의 집’까지 직선 거리 700m가 넘는다. 겨레의 집을 호위하듯 반원으로 둘러싼 상설전시장만 돌아 보는 데도 족히 2시간은 걸린다.

주차장부터 걸어 정문을 통과하면 51m 높이의 ‘겨레의 탑’이 위용을 뽐낸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의 날개와 기도하는 양손을 표현했다. 전면과 후면에는 각각 태극과 무궁화 문양이 새겨져 있다. 마주 선 두 개의 탑신 사이를 통과하면 청록색 기와 지붕인 겨레의 집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고려시대 건축물인 예산 수덕사 대웅전을 본떠 설계한 맞배지붕 건물이자 동양 최대의 기와집이다. 내부 중앙에는 백두산 천지와 연결된 군상 조각을 상징 조형물로 배치했다. 건물 서편 홍보관에 독립기념관을 건립한 취지와 과정을 전시하고 있다.

독립기념관 전시실 앞의 윤봉길(왼쪽부터), 안중근 의사, 김좌진 장군 동상.
제3관 ‘나라 지키기’ 전시실. 도산 안창호의 어린 시절 사진으로 시작한다.
제3관 ‘나라 지키기’ 3ㆍ1만세운동 영상. ‘독립만세’ 함성이 전시실에 가득 퍼진다.

본격적인 관람은 제1관 ‘겨레의 뿌리’로 시작한다.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숱한 외세의 침략을 슬기롭게 극복한 사료를 시각적으로 전시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고난의 역사를 전시한 제2관 ‘겨레의 시련’은 현재 전시물 교체로 휴관 중이다. 제3관 ‘나라 지키기’는 의병운동, 애국계몽운동, 국채보상운동 등 일제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펼친 다방면의 독립운동을 보여 준다. 안창호, 안중근 등 이름난 투사뿐만 아니라 온 겨레가 거리로 나선 3ㆍ1운동까지 만세의 함성이 전시장을 가득 메우는 듯하다.

제4관 ‘평화누리’는 뜨거웠던 만세운동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잠시 쉬어 가는 공간이다. 독립과 자유를 민족적 관점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라는 보편적 가치와 연결시킨 3D 체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제5관 ‘나라 되찾기’는 만주와 연해주, 미주 등 국외 무장 독립투쟁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영화로 제작돼 관심을 모으고 있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도 큰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 제6관 ‘새 나라 세우기’는 일제강점기에 전개된 민족문화 수호운동과 각계 각층의 사회운동, 독립운동의 중심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련한 사료를 전시하고 있다.

제5관 ‘나라 되찾기’ 전시관. 해외 무장독립투쟁의 역사를 담고 있다.

전시관 관람을 마치고 야외 전시시설까지 돌아보면 좀 더 가슴 뭉클한 역사 여행이 된다. 나들이나 데이트 코스로 독립기념관을 찾는다면 실내 전시관보다 자연과 어우러진 야외 전시시설을 돌아보는 편이 오히려 낫다. 독립기념관에는 겨레의 집을 가운데 두고 전시관 외부를 한 바퀴 두르는 ‘통일의 길’, 그 외곽을 또 크게 한 바퀴 도는 ‘단풍나무 숲길’, 두 개의 산책 코스가 있다.

통일의 길 주변에는 애국 선열 103명의 시비와 어록비가 곳곳에 세워져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에 나섰다가 문득문득 마주하는 애국지사와 독립투사의 한마디 한마디가 돌보다 묵직하게 심금을 울린다.

‘백련못 오솔길’ 초입에 자리잡은 한용운의 글부터 울컥한다. “위압적인 평화는 굴욕이 될 뿐이니 참된 자유는 반드시 평화를 동반하고, 참된 평화는 반드시 자유를 함께 해야 한다.” 1919년 옥중에서 쓴 문장마다 시대를 뛰어넘는 깊은 사유를 담고 있다. 불 같은 격문이 아니라 품위 있고 준엄한 꾸짖음에 힘이 넘친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는 안창호의 말은 오늘의 청년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이다. 나라를 지켜 온 선열의 마음은 일제강점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임진왜란 당시 도원수 권율의 격문과 의병장 곽재우의 시에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 우국충정이 묻어난다.

만해 한용운이 1919년 옥중에서 쓴 글.
윤봉길 의사의 어록 비석.
안중근 의사의 ‘동포에게 고함’ 어록비.

대한제국 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은 ‘동포들에게 고함’에서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 감옥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동포 형제 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야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야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고 했다. 만주벌 호랑이로 불린 김동삼은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는 옥중 유언을 남겼다. 모두 죽어서라도 꼭 조국 독립을 보고야 말겠다는 투사의 의지가 담겨 있다.

한여름 녹음으로 애써 눈길을 돌리며 꾹꾹 눌렀던 감정이 어록비가 숲을 이룬 전시실 뒤편에서 결국 터지고 말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동휘의 ‘독립전쟁’ 어록은 100년 후 일본과의 ‘경제전쟁’을 예견이라도 한 듯한 결기로 충만하다. “이천만 동포는 다 최후의 일인이 필사(必死)하기까지, 최후 일인의 혈점(血點)이 필적(畢滴)하기까지…최후의 혈전(血戰)이라야 반드시 영원한 독립을 성공하리라 하노라.” 1919년 대한민국 원년 11월 4일의 다짐이자 격문이다. 부근에는 사대부 집안 여성으로 무장독립투쟁에 헌신한 남자현 지사의 단지(斷指) 혈서 어록이 새겨져 있다.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 깊게 파인 다섯 글자가 핏자국처럼 선명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동휘가 1919년에 쓴 ‘독립전쟁’ 글귀가 100년 후 ‘경제전쟁’을 예고한 듯 묵직하게 다가온다.
어록비가 모여 있는 동산의 무궁화. 고목에서 다시 가지를 뻗어 꽃이 활짝 피었다.
여성으로 무장독립투쟁에 앞장선 남자현 지사의 단지 혈서 어록비.

직접 보고 겪은 바를 의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체험이라 한다면 독립기념관의 애국시와 어록비 코스는 최고의 체험 장소다. 민족적 울분과 나라를 되찾겠다는 비장함을 넘어 불의에 맞서는 정의와 용기, 물 흐르듯 바른 길을 찾아가는 역사의 순리가 이 길을 걸으며 저절로 체득된다. 각양각색의 바위에 새겨진 수많은 격문과 어록이 이 나라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증언하고, 100년이 지나 일본과 경제전쟁을 치르고 있는 지금의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하는지 침묵으로 일깨운다.

어록비가 놓인 통일의 길은 외곽의 단풍나무 숲길과 연결된다. 세월이 쌓인다는 건 숲이 자란다는 것과 같다. 독립기념관을 개관한 지 어언 30년이 넘었다. 1,200여그루의 단풍나무가 3.2km 산책로에 터널을 이뤘다. 국내 최대 단풍길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하다. 이런 단풍 숲이 있는 줄 알았다면 가을에 올 걸 싶다가도 ‘이만하면 됐지, 무얼 더 바랄까’ 욕심을 내려 놓는다. 오로지 단풍나무로만 연결된 숲길, 그 단순함이 좋다. 때마침 장맛비가 내렸다. 잎 끝에 맺혔던 달콤함이 부슬부슬 떨어진다.

독립기념관 외곽의 단풍나무 숲길.
3km 넘는 산책로에 단풍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다.
◇백로가 호위하는 ‘석오 이동녕 기념관’

독립기념관에서 약 3km 떨어진 곳에 ‘석오 이동녕 기념관’이 있다. 목천읍 동리에서 태어난 이동녕(1869~1940)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초대 의장을 지냈고, 목숨을 다하는 날까지 민족의 큰 어른으로 해외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기념관은 2010년 그의 독립 의지와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 생가 터 앞에 개관했다.

목천읍 동리의 이동녕 복원 생가 뒤편 숲에 백로와 왜가리가 둥지를 틀었다.
백로와 왜가리가 날아들어 마을에서는 황새산으로 부른다.
석오 이동녕 기념관 입구에 대형 초상이 걸려 있다.

‘대의(大義)’라고 쓴 기념석과 흉상이 놓인 입구를 통과하면 그의 호를 따 ‘석오 이야기’로 생애를 정리해 놓았다. 교육자, 언론인, 정치인으로서 석오의 다양한 면모를 소개하고, 친필 휘호와 서신, 임시정부 문서, 초상화, 사진 등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 옆 산자락에는 생가를 복원해 놓았다. 입구에 생전에 자주 인용했던 ‘산류천석(山溜穿石)’ 휘호를 새긴 기념석이 놓여 있다. 산에서 흐른 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뜻으로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가 담긴 문구다. 생가 뒤편 짙푸른 숲에는 백로와 왜가리 100여마리가 둥지를 틀어 신비로움을 더하고 있다. 이 때문에 황새산으로 불리는데, 더 오래된 옛날에는 임금이 살 만하다고 해서 구중봉으로도 불렸다. 생가는 이동녕의 조부가 구입해 부친이 생활한 곳으로 마을에서는 당시부터 명당이라는 이야기가 자자했다고 한다.

◇걸음마다 ‘만세’ 함성…병천면 아우내와 유관순열사사적지

독립기념관에서 약 8km 떨어진 병천면 소재지는 유관순 열사가 아우내 만세운동을 주도한 곳이다. 아우내는 칡악내(葛田川)와 잣밭내(栢田川) 두 하천이 만나 어우러진 하천이라는 의미로 병천(竝川)은 아우내의 한자 표기다.

병천면 소재지의 아우내 만세운동 기념공원.
매봉 자락 유관순열사 사적지에서 보이는 아우내 풍경.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열린 건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꼭 한 달 뒤인 4월 1일 병천 장날이었다. 맞춘 것처럼 음력 3월 1일이었다. 아우내는 용인과 진천을 거쳐 삼남으로 가는 길목으로 1700년대부터 대규모로 장이 서는 곳이었다. 장날을 거사일로 택한 이유다. 만세운동에는 일본 헌병 추산 3,000명,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6,000명이 참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유관순 열사는 만세가 열리기 하루 전 마을 앞 매봉 꼭대기 봉화대에 불을 피워 인근 지역에 알렸다. 일본 헌병 보고서는 ‘여기저기 불꽃이 일어 분위기가 불온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날 만세 시위대 진압 과정에서 19명이 사망하고 30여명이 부상했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의 순국자 추모각에는 49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어 실제 사상자는 일본 헌병의 기록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사망자 중에는 열사의 부모도 있었다.

병천시장 어귀(병천리 288번지)에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다. 공원 중앙에 저고리 차림의 아낙과 도포에 갓을 쓴 노인까지,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남녀노소를 형상화한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유관순기념관에 전시된 뜨개모자. 5촌 조카에게 준 돌 선물로 열사의 손때가 묻은 유일한 유품이다.
유관순열사사적지의 열사 동상.

아우내 장터의 앞산, 매봉 자락의 ‘유관순열사사적지’에 가면 그의 삶과 아우내 만세운동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사적지의 유관순기념관에는 1902년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나 이화학당 재학 시절 3ㆍ1만세운동에 참가하고, 휴교령이 내려진 후 고향으로 돌아와 아우내 만세운동을 주도한 과정, 서대문형무소 안에서까지 만세운동을 전개하다 모진 고문을 받고 1920년 순국하기까지, 짧지만 불꽃 같았던 생애를 전시하고 있다. 만세운동 직후 살던 집이 불태워져 남은 유품이 하나도 없는데, 1917년 5촌 조카에게 돌 선물로 직접 떠 준 뜨개모자가 보는 이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벽관’을 비롯한 서대문형무소의 고문 시설을 재현한 전시물은 차마 바로 보기 힘들다. 기념관을 나오면 마당 한쪽에 열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아우내 장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열사와 순국자 추모각이 별도로 자리 잡고 있다.

병천면 용두리 유관순 열사 생가와 매봉교회.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사적지 뒷산, 매봉을 돌아가면 용두리 마을 어귀에 유관순 열사 생가를 복원해 놓았다. ‘ㄱ'자 초가 건넌방에 만세운동 준비 당시 사촌언니와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생가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매봉교회는 여느 시골 교회에 비하면 제법 규모와 품격을 갖췄다. 열사가 어릴 적부터 다니던 교회로,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하기 전 공주영명학교에서 수학한 것도 이 교회가 주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세운동이 열린 아우내 장터와 사적지를 거쳐 생가까지 ‘유관순 따라걷기길’이 조성돼 있다. 매봉 정상의 봉화대와 중턱의 열사 초혼묘, 수신면 홍대용과학관까지 연결해 총 12km다.

병천순대거리 한 식당의 모듬순대.
병천순대 거리 식당의 순대국밥. 식성에 따라 청량고추 첨가. 가격은 8,000원이다.
원조를 자부하는 한 업체의 천안호두과자. 병천시장에는 2개의 대형 호두과자 업체가 있다.
◇독립기념관과 병천(아우내)시장 여행 정보

▦천안역(경부선ㆍ수도권전철 1호선)에서 400번 버스가 20분 간격으로 독립기념관과 병천면 소재지까지 운행한다. 승용차를 이용하면 경부고속도로 목천IC에서 가깝다. ▦독립기념관은 주차료(2,000원)만 받고 관람은 무료다. 매일 4회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중심으로 약 50분간 2~3개 전시관을 둘러보는 해설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인터넷 예약이 필수다. ‘겨레의 집’ 고객지원센터에서 음성안내기를 대여(2,000원)할 수도 있다. 주차장에서 전시관을 오갈 때는 태극열차(편도 1,000원)를 타도 된다. ‘통일의 길’을 이용해 겨레의 탑과 겨레의 집 사이를 2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중간에 타거나 내릴 수 없다. 매주 월요일 휴관. ▦병천은 유관순 열사 못지않게 순대로 유명하다. 1950년대 인근 햄 공장에서 나오는 부산물로 장날 순댓국을 만들어 판 것이 시작이었다. 1990년대에는 순대전문식당이 하나 둘씩 늘어 현재 병천(아우내)시장에 20여곳의 대형 식당이 성업 중이다. 병천순대는 가는 창자를 써서 특유의 돼지 누린내가 적고 한입에 쏙 들어가는 크기여서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식당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순댓국밥 8,000원, 모듬순대 1만2,000원 수준이다. 천안의 명물 호두과자 전문점도 2곳 있다.

천안=글ㆍ그림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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