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인수자금 2조5000억 지원” 공언… 반도체업계 “급한 불 못 끌 것” 
반도체 노광 공정 및 포토레지스트 개요. 그래픽=김경진기자

정부가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 우대국)’ 배제 조치를 계기로 국내 기업의 외국 소재ㆍ부품ㆍ장비 회사 인수합병(M&A)를 적극 지원하기로 했지만 업계에선 회의론이 파다하다. 중장기적 관점에서 초기 기술기업을 육성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반도체 업계에선 ‘즉시 전력감’이 될 만한 기업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 수출규제 품목 중 가장 파급력이 크다고 평가받는 포토레지스트는 M&A로 대응할 여지를 찾기 힘들다는 분석이 나온다.

 ◇인수하려 해도 모두 일본 기업 

8일 M&A 및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3대 국책은행(산업 수출입 기업)이 참여하는 ‘해외 M&A 인수금융협의체’를 이달 말까지 구성해 소재ㆍ부품ㆍ장비 관련 핵심기술 획득이나 공급라인 확보를 위해 외국 기업을 인수하는 국내 기업에 2조5,000억원 규모의 인수자금을 지원할 계획이다. 기획재정부는 해당 기업에 법인세 세액공제(공제율 5~10%) 혜택도 부여한다.

반도체 업계에선 일본이 지난달 수출규제 조치를 취한 △포토레지스트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소재 3종의 대체 거래선 확보가 급선무다. 상황이 가장 심각한 건 포토레지스트다.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 제작 첫 단계인 노광(빛으로 웨이퍼에 회로를 그리는 과정) 공정에 사용되는 소재인데, 국내에선 포토레지스트 생산이 전무한 것은 물론이고 생산 기반이 될 수 있는 노광 공정 기술 및 장비의 국산화율도 제로(0)다.

M&A를 통한 최선의 수습책은 포토레지스트를 안정적으로 생산하는 기업을 인수하는 것이다. 문제는 포토레지스트 제조기업 대부분이 일본 기업이라는 점이다. 시장점유율로 보면 JSR(24%), 신에츠화학(23%), 도쿄오코공업(22%), 스미토모화학(16%), 후지필름(9%)등 5개 일본 기업이 시장을 할거하고 있다. 미국 기업인 다우케미칼과 인프리아의 점유율은 6% 수준에 불과하다.

M&A 업계 관계자는 “일본이 수출 규제에 나선 상황에서 한국 기업이 일본 기업을 인수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라며 “남은 대안은 미국 기업들인데 일본 기업에 비해 기술력이 뒤처져 인수 가치가 떨어진다”고 말했다.

 ◇슈퍼갑 네덜란드 기업 인수도 언감생심 

차선책은 노광 공정을 안정적으로 다룰 기술이나 장비를 인수하는 방법이다. 업계 관계자는 “노광 기업은 포토레지스트 생산에 필요한 핵심 기술들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관련 기업으로는 네덜란드의 ASML, 일본의 니콘과 캐논이 손꼽힌다. 특히 ASML은 반도체 회로를 20나노미터 미만 간격으로 세밀하게 그릴 수 있는 ‘극자외선(EUV) 노광 기술’을 독점 보유하고 있어 매력적이다. 차세대 반도체는 대부분 EUV 노광 기술ㆍ장비가 꼭 필요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ASML은 시장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매물로 나올 이유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 분석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ASML 장비를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좋은 반도체를 얼마나 생산하느냐와 직결된다”며 “그렇다 보니 ASML이 ‘슈퍼갑’의 위치에서 삼성전자 등 반도체 제조기업에 장비를 납품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M&A업계 관계자는 “자체 능력으로 글로벌 기업들을 대상으로 판로를 확보한 ASML이 특정 기업에 인수되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며 “니콘, 캐논의 노광 사업부를 분할해 사들이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일본 기업이라 당장 불가능하고 기술력으로 봐도 의미가 없다”고 일축했다.

 ◇반도체 소재기업 M&A시즌 이미 종료 

반도체 소재 기업을 인수하기엔 타이밍이 늦었다는 분석도 있다. 인수를 검토할 만한 해외 소재 기업들이 2017~18년 한꺼번에 매물로 나왔다가 주인을 찾았다는 것이다. 김양재 KTB증권 연구위원은 “버슘머티리얼즈, 에어프로덕츠 등 기술력을 갖춘 기업들이 최근 2년 사이에 M&A 되면서 소재 영역의 합종연횡은 사실상 마무리됐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반도체 제조사들이 최근 3, 4년 동안 소프트웨어 분야 기업 인수에 집중하느라 소재 기업 인수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삼성전자가 최근 5년간 완료된 20건의 M&A 중 40%가 소프트웨어 업종의 기업 인수로, 여기엔 음성변환 업체 이노틱스, 인공지능 플랫폼 기업 비브랩스 등이 포함돼 있다.

한 M&A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의 이런 인수 전략은 ‘기초소재(일본)→완성품 생산(한국)→글로벌 IT기업 구매’의 반도체 국제 공급망에 대한 믿음이 전제돼 있었던 것”이라며 “이 믿음을 일본이 일방적으로 깨면서 예상치 못한 위기를 맞은 셈”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시기적으로 소재 기업 인수는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삼성전자가 자체적으로 소재를 개발하기 위해 태스크포스(TF)를 꾸린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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