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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와 표적] 사우디에 ‘스마트 폭탄’ 생산 기술 이전하려는 트럼프 행정부

입력
2019.08.08 19:00
수정
2019.08.12 10:48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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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방위산업기업 레이시온이 제작한 정밀유도폭탄 ‘페이브웨이’의 모습. 레이시온 홈페이지 캡처
미국의 방위산업기업 레이시온이 제작한 정밀유도폭탄 ‘페이브웨이’의 모습. 레이시온 홈페이지 캡처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의사당에서 행해진 표결은 ‘인도주의’라는 보편적 가치가 ‘국익’이라는 명분, 더 정확하게는 ‘돈’이라고 하는 물질적 이득 앞에선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일깨워 줬다. 그날 미 상원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등에 대한 81억달러(약 9조8,456억원) 규모의 미국산 무기 판매를 의회의 반대는 아랑곳없이 그대로 강행하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더 이상 가로막지 않겠다는 의사를 투표 결과로 드러냈다. 앞서 사우디 반정부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사건, 예멘 내전 개입 등과 관련, 사우디 정부의 책임을 묻겠다면서 상ㆍ하원이 채택했던 무기 수출 금지 결의안 3건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행사한 거부권을 무력화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이로써 의회가 미국과 사우디 간 무기 거래를 중단시킬 뾰족한 방법은 사라졌다. 국가 간 외교를 사업, 곧 비즈니스(business) 정도로 여기는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의회 승인 절차도 건너 뛰는 등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던 ‘대(對)사우디 무기 수출’에 더욱 가속도를 낼 수 있게 됐다. 미 군사전문매체 디펜스뉴스가 이 소식을 전하면서 “미 상원이 트럼프의 거부권을 유지시켜 줌으로써, 사우디에 대한 무기 판매를 허용해 줬다”는 제목을 붙인 이유다. ‘미국 우선주의’가 트럼프 대통령의 전유물로 여겨지긴 하지만, 결국에는 미 의회도 이에 동조하고 있음을 보여 준 사례다.

2017년 9월 폴란드 키엘체에서 열린 국제무기박람회에 미 방산기업 레이시온의 부스가 설치돼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2017년 9월 폴란드 키엘체에서 열린 국제무기박람회에 미 방산기업 레이시온의 부스가 설치돼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그런데 이 사안이 커다란 논란을 부른 건 단지 사우디의 반인도적 행위에 미국이 눈을 감는, ‘세계의 경찰국가’를 자임하는 미국이 내세우는 정의에 걸맞지 않은 처사라는 도덕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거래 내용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실리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미국의 국익을 침해할 소지가 다분한 계약이라는 얘기다.

81억달러 중 16억달러가 ‘정밀유도폭탄’

미국이 이번에 사우디에 판매하는 무기는 정밀유도폭탄(Precision-Guided BombsㆍPGB)과 F-15 전투기, 대전차 미사일, 박격포, 반자동 소총 등 총 22개 품목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문제의 핵심은 미국의 방위산업기업 레이시온(Raytheon)사가 제작한 ‘페이브웨이(Paveway)’ 정밀유도폭탄이다. 미국은 사우디에 이 폭탄 12만발 제공은 물론, 사우디가 국내에서 그 부품들을 생산할 수 있도록 기술 이전까지 하는 패키지 계약을 맺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의 위협’을 이유로 무기수출통제법상 긴급 조항을 발동, 의회의 검토ㆍ승인 없이 사우디 등에 무기를 판매하겠다고 공표(5월 24일)한 지 2주 후인 지난 6월 7일에야 뉴욕타임스(NYT) 보도로 드러났다.

파장은 컸다. NYT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레이시온과 사우디가 정밀유도폭탄의 제어 시스템과 유도 전자 장치, 회로 카드 등을 자체적으로 조립하도록 전면적 허가권을 줬다. 국가 안보상의 이유로 철저한 기술 보안을 지켰던 과거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테드 리우(민주ㆍ캘리포니아) 하원의원은 “우리의 기술력을 잃어버리고 향후 의회의 감독을 방해하겠다는 것 외에는 어떤 목적도 이루지 못하는 거래”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미국 공군 F-35A 전투기가 레이시온사 정밀유도폭탄 ‘페이브웨이’를 투하하고 있다. 미 공군 제공ㆍ레이시온 홈페이지 캡처
미국 공군 F-35A 전투기가 레이시온사 정밀유도폭탄 ‘페이브웨이’를 투하하고 있다. 미 공군 제공ㆍ레이시온 홈페이지 캡처

특혜 의심마저 제기된다. 페이브웨이와 관련, 레이시온의 대 사우디 계약 액수는 16억달러(약 1조9,440억원)로,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사시키려 했던 무기 수출 총액 81억달러의 약 20%에 이른다. 특히 지난달 23일 취임한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은 2010년부터 7년간 레이시온에서 대관 업무 담당 부사장으로 일하며 로비스트 역할을 했던 인사라는 점은 예사롭지 않은 대목이다. 하원 감독위원회도 보고서를 통해 "미국이 신기술을 사우디에 수출, 일부 기업과 대통령 측근들에게 이득을 주려 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美무기수출 타격, 중동 불안 야기할 수도

이처럼 민감한 반응이 나오는 건 정밀유도기술의 확장성 때문이다. 목표 지점을 향해 날아가는 정밀유도폭탄은 상공에서 단순히 투하되기만 하는 재래식 폭탄, 이른바 ‘멍청이 폭탄(Dumb Bomb)’과 대비해 ‘스마트 폭탄(Smart Bomb)’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레이저 유도 방식을 채택한 레이시온 페이브웨이의 경우, 지상군이나 전투기가 공격 타깃에 발사한 레이저빔의 반사 신호를 감지해 목표물을 타격한다. “유도 장치 없는 폭탄보다 대략 90배 이상 높은 정확도를 보여 준다”는 게 레이시온의 설명이다.

지난해 3월 20일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백악관에서 방미한 무함마드 빈살만(왼쪽)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회담을 하는 도중, 미국의 무기 판매와 관련한 차트를 들어 보이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지난해 3월 20일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백악관에서 방미한 무함마드 빈살만(왼쪽)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회담을 하는 도중, 미국의 무기 판매와 관련한 차트를 들어 보이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문제는 이 같은 유도 시스템이 오로지 폭탄에만 적용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뉴욕주립대 올버니 캠퍼스 국제안보상업경제국가정책연구센터(PISCE)의 놀란 파렌코프 연구원은 외교안보전문 블로그 ‘워온더록’ 기고문에서 “사우디에 유도 무기 기술을 제공하는 건 어마어마한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면서 “전 세계에 걸쳐 고성능 미사일과 유도 무기가 급격히 확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순항미사일과 탄도미사일, 우주 기술, 나아가 핵 무기 개발에도 파급 효과가 미칠 수 있다는 우려다. 실제로 사우디는 우크라이나, 중국 등과의 협력을 통해 미사일 시스템 개발에 상당한 돈을 투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파렌코프 연구원은 페이브웨이 기술 이전과 관련, “워싱턴은 리야드(사우디의 수도)에 엄청난 지식과 경험을 선사하면서 미사일 생산 노력에 결정적 무대를 마련해 준 것”이라며 “스마트 폭탄 기술에 대한 접근권은 사우디 미사일 프로그램에 있어 혁명적 변화”라고 단언했다.

그 결과, 미국도 부메랑을 맞을 공산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현재 미국의 무기 판매에 있어 ‘최대 고객’은 사우디다. 2017년 5월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첫 해외 순방지로 사우디를 택했고, 당시 1,100억달러 규모의 무기 수출 계약을 맺었을 정도다. 그러나 정밀유도무기 분야에서 사우디가 잠재적인 경쟁자로 부상하게 될 경우, 이는 곧 미국 무기 수출의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사우디의 무기 개발은 이란과의 대립 속에서 중동 정세 불안을 야기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미국 싱크탱크인 국제정책센터의 윌리엄 하르퉁 국장은 “이번 계약의 결과로 사우디가 정밀유도폭탄의 자체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된다면, 그들이 예멘에서 행한 것과 같은 무자비한 공격을 억제하는 미국의 지렛대 역할이 약화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정우 기자 woo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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