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모토와 사살된 호랑이 두 마리. 위키피디아

오랜 기간 함께 살아온 환경에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환경에 적응하여 변화해 간다. 그래서 이 관계는 생태적임과 동시에 문화적이다. 16세기부터 시작된 제국주의의 열풍을 좇아 유럽인들은 이전에 몰랐던 ‘새로운’ 땅을 발견하고, 이곳에 다양한 방식으로 정착하고 이곳의 자연자원과 문화자원을 이용하는 데 열광했다. 물론, 그곳에 원래부터 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이는 폭력적이고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들,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생태 환경에도 영향을 끼쳤다.

유럽인들이 성공적으로 이동하고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무기나 조직적인 군사력뿐 아니라 생태적인 요인의 덕이기도 하다. 기존에 접촉이 빈번하지 않았던 두 개의 세계가 만나면서 사람과 가축, 식물 그리고 병원체가 토착민과 토착 생물을 황폐화 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학자인 앨프리드 크로스비는 이를 생태제국주의(ecological imperialism)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설명한다. 이렇게 질병뿐 아니라 인간동물관계도 제국주의의 영향 아래 들어간다. 구한말 한반도로 밀려들어온 열강의 세력 앞에 우리의 전통적인 인간동물관계 역시 제국주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배는 조선의 동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한반도 호랑이 사냥해 호랑이고기 시식회까지 

20세기 초반 한반도의 호랑이는 생태적인 이유로 사람들이 포획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1922년 경주 대덕산에서 포획된 대호(大虎ㆍ한국일보 1980년 1월 26일), 1924년 강원도 횡성에서 잡힌 호랑이(매일신보 1924년 2월 1일), 그리고 1932년 함경남도 정평에서 포획된 길이 8척의 호랑이(중앙일보 1932년 3월 12일)는 한반도에 남았던 거의 마지막 호랑이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1935년 조선의 동물상을 조사하기 위해 백두산을 찾았던 스웨덴 박물학자인 슈텐 베리만도 ‘한국야생동물지’에서 백두산에 호랑이, 표범, 스라소니, 곰과 같은 맹수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걸 보면 1930년대 말까지는 이 영험한 동물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전설화나 민화에서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때로는 친근하게 그려진 것과는 다르게 호랑이는 현실에서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위협적이고 두려운 존재였다. 그래서 호랑이와 같은 맹수를 잡아 민가에 피해가 없도록 하는 조치는 조선시대에도 행해졌다. 한반도에서 호랑이를 사냥하는 자(포수)와 쫓기는 호랑이는 우리의 생태환경 안에서 위험하지만 익숙하기도 하고 또한 두렵지만 경외심이 들기도 하는 복합적인 경험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호랑이를 사냥하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용맹함을 드러낸다거나 고기나 호피를 얻는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호랑이를 사냥하는 것은 단순히 자연을 정복하거나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호랑이가 살지 않는 섬에서 온 일본인들에게 호랑이를 사냥하는 신기한 경험, 식민지의 위험을 제거하는 일은 또다른 맥락을 만들었다. 1917년 일본인 야마모토 다다사부로(山本唯三郞)는 조선에 와서 호랑이 사냥을 떠났고 그 과정을 ‘정호기’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일본 제국주의의 재력가이자 주요 인물이었던 야마모토는 유명한 조선인 포수들과 기자단을 포함해 이른바 정호군을 꾸려 호랑이 사냥을 떠났다. “올해는 조선 호랑이를 모두 사냥하고, 내년에는 러시아의 곰을 사냥하세, 호랑이여 오라.” 이들이 불렀다는 노래의 구절에서 단순히 호랑이와 곰이 동물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당시가 일제가 대륙을 향해 제국주의의 야심을 확장해 나가던 시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호랑이 두 마리를 잡은 정호군은 일본으로 돌아가 제국호텔에서 호랑이고기 시식회까지 성대하게 열었다.

 ◇개 25만두를 도살한 야만의 제국주의 

당시 조선의 개들은 사람 사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낯선 이를 향해 적개심을 드러내는 전통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당연한 동물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1908년 축견단속규칙과 1911년 축견취체규칙을 통해 모든 개에게는 주인의 이름을 쓴 표찰을 붙이고 표찰이 없는 개는 ‘야견(野犬)’으로 간주하여 살처분(撲殺)하도록 지시했다. 이유는 개에게 물리는 피해를 줄이고 광견병의 위험을 줄이는 것이었다.

선교사인 릴리어스 호톤 언더우드가 언급했듯 외부인들은 “조선의 개들은 서구 사촌들이 보여주는 문명화된 표징이 결핍되어 있으며 통상적으로 겁에 질려 있고, 야생적이며 들개 같이 천하다”거나 “광견병에 걸린 수많은 개가 사람과 동물을 물어뜯으며 거리를 질주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개의 유행병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대량 도살 뿐”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은 이를 다르게 받아들였다. 축견을 통제하는 것은 외세의 지나친 압력이라고 여겼다. 개를 죽이는 정책이 사람들을 보호하고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는 구실로 외부인들에게 아부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이전에도 현재도 듣도 보도 못한 법”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게다가 일제가 경찰과 백정을 동원해 표찰이 없는 개들을 찾아내고 도살하는 과정에서 부녀자와 노인들에게도 폭력이 난무했고, 사람이 다치고 죽기까지 했다. 개들을 빼앗아 때려죽이는 일들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초기에 야견박살에 동원되었던 형평사의 백정들은 결국 공식적으로 이 일을 하지 않기로 했고, 야견박살을 담당해야 하는 위생인부들이 단체로 업무를 거부하는 사태도 일어났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일제는 일제강점기 동안 25만두를 훨씬 넘어서는 개들을 도살했다. 문제는 이런 야견박살 정책이 실제 광견병과 개 물림 피해를 줄이는 데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는 1930년대부터 부족한 전쟁물자 공급을 위해 연간 평균 10만장 이상의 견피를 공출했다. 군인과 경찰이 입회한 가운데 사람들은 개를 데려와서 검사 받고 크기가 적절한 개를 골라 도살했다. 개를 끌고, 지게에 지고, 안고 면사무소로 데려온 사람들이 정든 개를 죽인다는 생각에 끌려가는 개를 안고 눈물을 흘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조선의 종빈우와 양돈(조선축산협회, “조선축산의 개요”, 1927)
 ◇가축의 이동과 변화 

조선의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소와 돼지, 그리고 닭 등 가축의 품종 개량이 시도되고 있었다. 일본은 1906년 수원에 설립한 권업모범장을 주도하면서 일본식 축산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 재래종인 돼지와 닭이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돼지의 경우 서양 품종인 버크셔 종과 재래종을 교배하여 개량종을 만들고, 닭의 경우 백색레그혼, 플리모스 록, 나고야 코친 같은 외국 품종을 배포했다. 털이 많고 몸집이 작은 조선 재래종 돼지는 결국 점점 사라졌다. 개량종의 분포지역과 질병 분포가 대부분 일치하는 것을 볼 때, 이전에 없는 돼지열병이나 뉴캐슬 같은 가축질병이 개량종 도입과 함께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930년대들어 돼지와 닭은 개량종이 재래종의 사육두수를 넘어서게 된다. 일제강점기 초기와 비교해서 1930년대까지 총 가축사육두수는 2배 가까이 증가했다.

조선우는 축력을 이용하고, 식용으로도 이용가능하기 때문에 우수한 재래종을 육성하고 이들을 종모우로 삼아 지역 축우를 개량하는 방식을 취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으로 이출된 소의 수는 약 150만두에 이른다. 게다가 살아있는 소를 배에 실어 옮겼다. 목포항, 부산항, 원산항 등 규모가 큰 항구에서는 기중기에 매달려 배로 선적되는 조선우를 볼 수 있었다. 당시는 동물 이동을 위한 어떠한 복지적 배려도 없었을 테니 긴 시간 항해를 해야 하는 소들의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항만에는 일본으로 유입되는 우역이나 구제역 같은 가축전염병을 막기 위해 근대 검역 시설이 들어섰다. 일본은 조선의 항만과 일본의 항만에서 두 번에 걸쳐 깐깐한 검역을 했다. 조선의 소는 일본에서 일본소보다 싸게 팔렸기 때문에 이런 복잡한 절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옮겨졌다.

원산항에서 이출우 선적 모습(조선축산협회, “조선의 이출우”, 1927)

모든 것이 식민지배로 인한 변화는 아니었을지라도 전통적인 맥락이 급격히 사라진 인간동물관계는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폭력일 수 있다. 식민지 권력은 가장 약한 존재인 동물들의 삶과 사회문화적인 의미까지 배려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고달픈 삶을 산 건 인간만은 아니었다.

천명선 서울대 수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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