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규 에밀타케식물연구소 이사장

30년간 가톨릭 환경운동가로 활동해 온 정홍규 신부

100년전 조선 식물분류 선구자 에밀 타케 신부 탐사

‘에밀 타케의 선물’ 발간…“생태를 읽어야 미래 보여”

“국립수목원 ‘왕벚나무 유전자 검사’ 신뢰할 수 없어”

정홍규 에밀타케식물연구소 이사장이 경북 청도읍 매전면 농막을 리모델링해 만든 연구소 앞에 앉아 신간 '에밀 타케의 선물'를 들여다보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다층적인 삶을 살아간다. 하나의 직업을 갖고 10~30년을 살아간다면 그 삶 속에는 희비곡선이 여러 갈래로 그어져 다층적이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나 다면적인 삶을 살아갈 수는 없다. 인생길을 어기차게 나아갈 땐 잘 못 느껴도 종래엔 허송세월한 인생으로 허무하게 마침표를 찍을 수 있어 썩 좋다 할 수 없다. 사람이 일생을 가꾸고 살면서 하나의 일을 만족스레 이루기도 어렵거늘 다방면에 걸쳐 몇 가지 일을 동시다발적으로 해 성공했다면, 그건 그야말로 천우신조가 아닐 수 없다. 좀 더 현실적으로는 다면적 삶을 살면서도 성공가도를 달린다면 그 삶을 일구는 이는 필시 사명감, 소명의식, 직업정신이 남다를 것이 틀림없다. 하늘의 부름을 받은 신실한 종교인이라면 다층적이면서도 다면적인 삶을 능히 살아갈 수 있으리.’

기자는 정홍규(65) 신부를 만나러 가기 전날 밤, 인터뷰를 준비하다가 문득 이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너무나도 다면적인 삶을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그의 직업이 대체 몇 개인지, 왜 이렇게 많은 일들을 하고 사는지, 그 많은 일들을 하면서도 지치지 않는지, 괴롭지 않은지 기자는 그것이 궁금했다. 최근 신간 ‘에밀 타케의 선물(다빈치)’을 낸 정 신부를 신부라고 소개해야 하는지, 환경운동가라고 소개해야 하는지, 에세이스트로 소개해야 하는지, 환경운동가 혹은 생태운동가라고 소개해야 하는지, 교수라고 소개해야 하는지, 대구·경북 사회적경제 대부라고 소개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다른 발자취가 너무 커 ‘에세이스트 정홍규’를 초라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이번엔 ‘에세이스트 정홍규’라고 소개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를 직접 만나 보고는 ‘정홍규 에밀타케식물연구소 이사장’이라고 머리글자에 박아 넣기로 굳혔다. 그를 [심지훈이 만난 사람]에 모신 까닭은 신부여서도, 교수여서도, 사회운동가여서도 아닌 재미나고 교훈적인 에세이 ‘에밀 타케의 선물’을 에밀타케식물연구소 이사장으로 냈기 때문이다. 마침 경북 청도읍 매전면 농막을 리모델링해 만든 에밀타케식물연구소에서 인터뷰를 가진 지난달 23일, ‘사단법인 에밀타케식물연구소’ 인가증이 전날 막 나왔다고 했다.

정홍규 에밀타케식물연구소 이사장이 연구소 앞에서 포즈를 쥐하고 있다.

-‘에밀 타케의 선물’은 어떤 책인가.

“100년 전 프랑스 선교사 에밀 타케가 불모지 한국에서 어떻게 식물분류학의 퍼스트 펭귄(first penguin·선구자)이 됐는지 탐사한 책이다.”

-타케 신부의 존재는 어떻게 알았나.

“대구 남산동 동네 주민이 ‘1922년부터 1952년까지 대구에 살았던 타케 신부가 왕벚나무를 심었는데, 어느 해 여름 태풍이 와서 죽어가는 걸 우리 할아버지가 막걸리를 줘 살렸다’는 얘기를 들어 알게 됐다. 2014년 8월 14일. 그 날짜를 잊지 못한다. 왕벚나무가 있는 자리는 천주교 대구대교구청이 있던 자리(現 대건고등학교 자리)인데, 거기서 근무도 하고 가톨릭 환경운동을 30년을 했는데도 그 사실을 몰랐다는 데 성찰했다. 24세에 격동기 조선에 들어와 79세에 대구 남산동에 뼈를 묻었지만 한 번도 그의 삶이 규명된 적이 없다.”

성찰은 세속적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반성하고 살핀다’는 뜻이다. 가톨릭에선 ‘고해 성사 전에 자신이 지은 죄를 자세히 생각하는 일’이란 의미로 쓰인다.

-타케 신부의 행적을 어떻게 따라갔나.

“남아 있는 자료가 없고 있었어도 소실됐다. 그래서 2014년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Missions Etrangeres de Paris)에 편지를 보냈다. 그해 연말 그의 사진 한 장과 프로필이 도착했다. 어디서 태어나서 언제 선종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걸 갖고 2015년부터 첫 번째 선교지 마산·부산·진주를 탐사했다. 1898년 마산에 와서 주로 그곳에 머물며 부산·진주로 선교활동을 다녔다.

파리외방전교회는 100여 년 전 혼돈의 조선 땅에 천주교의 기틀을 처음 마련한 프랑스의 선교조직이다. 이 선교회 본부에서 전 세계 가톨릭 선교의 행정과 살림살이를 총괄하는 사무총장 신부는 한국 이름을 가진 푸른 눈의 사제 홍세안(73) 신부다. 원래 이름이 ‘미셸 롱상(Michel Roncin)’인 홍 신부는 한국에서 중남미 출신 외국인노동자들 사이에서 ‘해결사’라 불렸다.

-현장에는 뭐가 있던가.

“1930년대 첫 번째 선교 본당을 지었는데, 그 자리에 왕벚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농막을 리모델링해 만든 에밀타케식물연구소 전경. 경북 청도읍 매전면 덕전리에 조성 중인 청도수목원 초입해 자리해 있다.

제주 왕벚나무 등 우리 식물 1만 여점 채집

독일 베를린대 쾨네 교수 통해 세계에 알려

학명에 ‘타케티’라 명명된 식물 모두 125종

-왕벚나무를 특별히 좋아한 것인가.

“타케 신부는 우리나라 자생 왕벚나무를 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사람이다. 1908년 4월 14일 그는 한라산 해발 600미터 지점에서 제주도 자생 왕벚나무를 발견했다. 그 표본을 1912년 독일 베를린대학 쾨네 교수에게 보냈다. 당시 장미과의 권위자였던 쾨네 교수는 그걸 학술지에 최초로 등재했다. 이 일은 일본 사꾸라와 선을 긋게 된 계기가 된 것으로, 36년 일제 치욕의 역사와 관련지어 생각하면 더 큰 의미를 갖는다.”

-해석 아닌가.

“아니다. 식물학적 사건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라 우리나라 토종 왕벚나무의 학명이 푸루누스 예도엔시스 마쯔무라(Prunus yedoensis Matsumura)로 일본어로 명명됐다. 학명은 한 번 정하면 다시 못 바꾼다.

-타케 신부가 제주도로 가게 된 사연이 뭔가.

“그가 제주도로 가게 된 것은 1902년인데, 전해 ‘이재수의 난’으로 기존 신부들에 대한 제주 주민들 여론이 좋지 않자 신부 한 명이 프랑스 본부에 다른 지역으로 보내달라고 청을 넣었다. 그 자리에 타케 신부가 가게 된 것이다. 타케 신부는 한라산을 바라보면서 선교를 시작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이재수의 난은 1901년 제주도 대정군에서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는 천주교인과 주민들이 충돌한 사건이다. 이재수와 오대현이 우두머리가 돼 민란을 이끌었다. 정부군에 의해 진압돼 이재수는 서울에서 처형당했다. 모두 300여 명이 숨졌다.

-뭔가.

“왜 식물을 1만여 가지나 발견했는가 살펴봤더니 돈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희귀식물 표본을 독일로 보내 포교비를 마련할 목적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아름다운 우리 식물에 빠져 1만여 점을 채집해 식물분류학자 반열에 올랐다. 처음엔 민란을 치유하러 갔다가 어지간한 식물을 다 만진 것 같다. 덕성이 높고 눈높이를 낮추니까 선교도 잘했고.”

-작년 9월 왕벚나무 원산지 논란이 110년 만에 종결됐다. 

“국립수목원에서 유전체 분석을 해 일본 것은 일본 것, 우리 것은 우리 것이라고 결론을 냈는데,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왕벚나무를 어떻게 유전자 검사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어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 일본사람은 좋을지 몰라도 우리는 그렇게 끝내면 안 된다. 일본 왕벚나무는 일본 것으로 인정해 준 격인데 왕벚나무 원산지는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 제주다.”

-국립수목원의 결과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건가.

“그렇다. 일본은 왕벚나무 자생지가 없다. 개량종일 뿐이다. 이 문제를 더 부각시키지 않으려고 우리도 좋고 일본도 좋게 만든 것 아닌가.”

-관련해 무엇을 할 계획인가.

“벚꽃은 그저 피고 지는 꽃이 아니다. 역사가 섞였기 때문에 그저 나무가 아니다. 우리나라 왕벚나무를 키워서 전국 방방곡곡에 심고, 노래도 만들고, 스토리텔링해야 한다. 대한민국에 있는 진해 등지의 왕벚나무는 모두 일본 것이다. 수입해 온 것이다. 박정희 정부 때 재일교포 한 분이 애국한다고 일본 왕벚나무를 엄청 수입해 왔다. 우리는 그걸로 벚꽃축제를 즐기고 그 와중에 일본 꽃 논란을 벌이는 것이다. 진짜 토종은 제주도에 있다. 우리 왕벚나무를 잘 육종해 입체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타케 신부의 최대 업적이라면.

“단연 우리 식물 1만 여점을 발굴한 것이다. 세계에 알린 것은 그 다음이다. 말이 식물채집이지 1만 여점을 찾고, 말리고, 붙이고, 표본으로 만들어 보내는 노력은 초인적인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

학명에 ‘타케티(taquetii)’라고 이름 붙은 식물은 모두 125종인데, 타케 신부가 최초 발견했기 때문이다. 정 신부는 ‘에밀 타케의 선물’에서 “타케 신부에게 조선은 또 하나의 조국이자 마지막 종착지였다”고 풀이했다.

-이 책의 백미는.

“이 책은 아주 도전적인 책이다. 제주도 밀감도 타케 신부가 들여왔다. 신부님은 한 마디로 제주도를 먹여 살린 분이다. 서론 결론만 읽어 봐도 이 분의 궤적을 알 수 있다.”

-앞으로 어떤 도전이 있나.

“식물주권 회복운동을 벌일 예정이다. 외국으로 나간 표본들을 재발굴·재구성하고, 일본 도쿄대, 교토대에 우리 식물이 어떤 것이 있는지 밝혀내는 작업도 해야 한다. 그런 작업을 통해 생태 문제, 미세먼지 문제를 고민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왜 그렇게 많은 일들을 하면서 살아왔냐고.

“똑같은 일을 다르게 하다 보니까 많은 일들을 한 것이죠. 말년에는 에밀타케식물연구소 이사장으로 삶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내 일로, 내 삶으로.”

정 이사장이 배웅하며 살며시 웃음 짓는데, 눈길은 왼쪽 모퉁이로 가닿았다. 그곳엔 도착하자마자 눈에 들어온 분홍접시꽃 세 송이가 간들거리고 있었다. 에밀타케식물연구소의 퍼스트 임프레션(first impression·첫인상)과 주인장은 그러고 보니 퍽 닮았다 싶다.

글ㆍ사진=심지훈 한국콘텐츠연구원 총괄에디터 s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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