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 받으려면 수화 통역사 직접 섭외… 통역 잘 안돼 재판 불이익도
2008년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시행되고 장애인의 사회 활동도 늘었지만 청각장애인에게 ‘사법’의 장벽은 여전히 높기만 하다.
우선 청각장애인들이 법률 상담을 받기 위해서는 수어 통역사를 스스로 섭외해야 한다. 사회적ㆍ경제적 약자의 법적 구제를 돕는 대한법률구조공단조차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어 통역은 제공하지 않고 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청각장애인이 법적 절차를 밟기 위해서는, 각 지역 농아인협회 등에서 제공하는 법률 상담 서비스를 통하는 게 거의 유일한 사법 통로다.
사법 절차는 적극적으로 자기 변론을 하기 어렵고 수어를 통해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청각장애인에겐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보건복지부의 ’청각ㆍ언어장애인(농아인) 의사소통 접근성 강화방안 연구(2013)’에 따르면 청각장애인들은 ‘법률’에 대한 의사소통에 가장 갈증을 느꼈다. ‘주로 어떤 분야에서 의사 소통을 지원받느냐’는 설문조사(383명 대상ㆍ다중응답)에서 △교육(35.1%) △보건ㆍ의료(15%)에 비해 법률은 4.7%로 가장 낮은 응답률을 보였다. 건청인(建聽人ㆍ청력에 손실이 없는 사람) 가족이 있는 일부 청각장애인만이 적극적인 권리 구제에 나설 수 있는 상황인 셈이다.
청각장애인이 사법 과정에서 권리 침해를 겪는 경우도 상당하다. 특히 조사와 재판 과정에서 청각장애인의 언어인 ‘수어’를 원활하게 사용할 수 없는 점은 가장 큰 걸림돌이다. 지난 4월 개최된 ‘형사ㆍ사법절차에서의 장애인 인권보장 방안’ 토론회에서 한 중증 청각장애인은 “민사 소송을 위해 수어 통역이 필요해 요청했으나 여러 차례 거절 당했다”며 “그렇지 않아도 소송과 관련된 일로 힘든데, 이러한 (장애인 차별) 대우가 너무 슬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고 토로했다. 2012년 영화 ‘도가니’의 소재가 됐던 광주인화학교 성폭력 사건과 관련한 손해배상 소송 첫 변론기일에선 재판부가 ‘인화학교 성폭력대책위원회’ 소속 청각장애인 방청객을 위한 수화 통역 요구를 기각해 논란이 된 적도 있다.
수어 통역이 제공되더라도, 수어와 청각장애인에 대한 몰이해로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경우도 있다. 수어에는 ‘변호사’ ‘판사’ 등 기본적인 단어만 있을 뿐 전문적인 법률용어나 어려운 단어가 없어 판사의 말을 통역하려면 하나하나 문장으로 풀어 설명해야 한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판사는 “하지 않은 말을 더하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기도 한다.
청각장애인이 송사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없고 공개 재판을 방청하기도 어려운 척박한 토양에서, 청각장애인을 가진 법률가가 탄생하는 장면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미국에는 250명이 넘는 청각장애 변호사가 ‘청각장애 및 난청 변호사협회(DHHBAㆍDeaf and Hard of Hearing Bar Association)’를 조직해 활동하고 있고, 일본에서도 1998년 청각장애인 변호사가 탄생했지만 아직 우리 사회엔 청각장애 법률가가 없다. 2016년 대법원 변호사단 입단식에서 미국 대법원장이 두 손으로 수어를 구사하며 청각장애 변호사 12명을 환영한 모습은 우리에겐 아직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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