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어느 날 미ㆍ영ㆍ중ㆍ소, 4개국의 대형 국기가 내걸린 과거 조선총독부 건물을 향해 태극기를 손에 든 군중이 행진하고 있다. 정확한 촬영 날짜와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무기력했던 서글픈 역사의 단면을 사진은 생생히 담고 있다(위 사진).
그로부터 71년이 흐른 2019년 대한민국은 또다시 흔들리고 있다. ‘경제 대국’ 일본이 보복성 수출규제 조치로 우리 경제의 숨통을 조여 오고, 러시아와 중국은 한일 관계 악화를 틈타 영공 침범을 감행했다. 거액의 방위비 분담금을 물리려는 미국의 압박 또한 집요하다. 한동안 잠잠하던 북한은 일주일이 멀다 하고 미사일과 방사포를 쏘아대고 있다. 이 같은 위기 상황 속에서도 정치권은 민생 대신 좌파ㆍ우파 진영 싸움에 더 몰두하고 있다.
지금의 정세 불안은 공교롭게도 1945년 해방 직후의 혼돈 상황과 흡사하다. 광복의 기쁨을 실감하기도 전에 결정된 미군과 소련군의 분할 점령, 좌익과 우익의 날 선 대립, 이어진 남한 단독 정부 수립까지의 과정에서 일제 잔재는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고 민생은 피폐했다. 한국일보 ‘뷰엔(View&)’팀이 국가기록원과 국사편찬위원회로부터 입수한 기록 사진에는 이 같은 해방 조선의 혼돈상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일부 개인이 촬영한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진을 미 육군 통신부대가 기록했고, 현재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ㆍNARA)이 소장하고 있다. 광복 74주년을 앞두고 역사적 장면에 담긴 시대상을 찬찬히 다시 들여다 본다.
#해방군이 왔다
1945년 9월 9일 서울역으로 몰려나온 수천 명의 시민은 성조기를 흔들며 미군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광복의 순간 못지않은 감격과 환호가 조선총독부로 향하는 미군의 행렬을 따랐다. 일본의 패전 선언 후 25일이나 지난 이날에야 조선총독부에 걸려 있던 일장기가 내려졌으나 그 자리엔 태극기 대신 성조기가 게양됐다. ‘해방군’이라 믿었던 미군은 이미 소련군과 한반도를 분할하기로 합의한 ‘점령군’이었다. 광복은 왔어도 진정한 자주독립은 오지 않았고 한반도는 혼돈의 역사로 빠져들었다.
#좌우익의 대립 격화
그 해 12월 29일 모스크바 3상회의 직후 발표된 신탁통치안은 조선을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놓았다. 우리 국민의 자치 능력을 부인하는 열강의 통치안이 자치 정부 수립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무참히 짓밟았음은 물론이다. 이후 좌익은 ‘찬탁’ 우익은 ‘반탁’을 주장하며 대립하면서 전국에서 과격한 정치 시위와 테러가 끊이지 않았다.
#곳곳에 남겨진 일제 잔재
조선총독부에 성조기를 게양한 미군은 조선 총독을 비롯한 경찰 및 행정 인력을 상당 기간 그대로 근무하도록 했다. 통치의 효율을 위한 조치였지만 우리 국민들에게는 실망과 분노를 안겨 줬다. 광복 후 두 달이 훨씬 지난 10월 22일까지도 총을 멘 일본군들이 미군과 함께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앞을 줄지어 이동하기도 했고, 끊이지 않던 각종 정치 집회 및 시위 장면에서도 치안 유지에 나선 경찰의 복장은 대부분 일본식 그대로였다.
#궁궐이 미 군정청 빨래 건조 장소로
미군 통신부대가 기록한 사진 중에는 비교적 자세한 설명이 적힌 경우가 있다.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드러난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현상을 묘사하기도 했다. 특히, 흰색 빨래가 널린 경복궁 근정문 앞 풍경을 촬영한 사진에는 “한때 한국의 왕이 어전회의를 열던 역사적 장소 경복궁이 이제는 미군정청 식당의 식탁보와 앞치마를 널어 말리는 장소로 쓰이고 있다(번역)”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일제에 의해 몰락한 국권을 광복 이후에도 회복하지 못한 채 미군정 치하에 놓이게 된 당시 우리 국민의 처연한 상황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하다.
박서강 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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