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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의 통찰력 강의] 악의 세력 뿌리를 뽑을 기회다

입력
2019.08.06 04:4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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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왜곡, 경제침략, 평화위협 아베정권 규탄 3차 촛불문화제’가 3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렸다. 참석한 시민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홍인기 기자
‘역사왜곡, 경제침략, 평화위협 아베정권 규탄 3차 촛불문화제’가 3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렸다. 참석한 시민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홍인기 기자

일본이 ‘백색테러’를 저질렀다. 대한민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며 스스로를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이유는 궁색하다. 대한민국의 성장이 두려운 까닭이다. 핑계는 강제징용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다. 그 문제를 지난 정부와 ‘거래’하려고 무수히 접촉했다. 이 나라 대표적인 로펌이 앞장섰다. 삼권분립의 의미와 가치조차 무시한 폭거다. 그런데도 당시 정부는 눈치만 봤다. 어쨌거나 일본이 우리보다 강하니까. 그건 부인하지 못하니까. 그러나 일본 내에서조차 강제징용에 대한 개인 배상은 유효하다는 견해가 있는데, 1965년 불공정한 한일협정으로 다 끝냈으니 불법이란다. 협약 하나로 과거사 끝이라는 발상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그런데 일본은 다 끝난 문제를 툭하면 들고 나온다며 우리를 정상국가로 대하지 못하겠다는 노골적인 적대다. 일본은 그걸로 퉁쳤다는 거다. 그러니 입 다물라는 거다. 그게 핵심이다. 그걸 제 입으로 말도 못하던 것들이 전전긍긍하며 덮으려했기에 곪아터진 종기다. 그러면서 지금의 정부 비판에만 혈안이다. 일본의 폭거에 당당하게 비판하지도 못한 자들이.

올해가 3ㆍ1독립운동 100주년이다. 일본의 태도에 분노한 시민들이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다.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며 단호하게 나섰다. 일본의 공세에 움찔한 세력들은 일본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게 아니라 정부를 비판한다. 문제의 발단을 키운 게 자신들의 정권이었음은 기억조차 하지 않는다. 민망하니 양비론을 끌어들인다. 지겹게 들었던 수법이다. 양비론은 전형적인 물타기다. 한 국가의 삼권분립조차 부인하는, 그것도 우리를 강제로 점령하고 악행을 저질렀던 일본의 비양심과 무지에 대해서는 입도 벙끗 못하는 것들이. 해방 이후 친일매국 세력을 근절하지 못한 업보다. 반민특위는 용두사미라는 말조차 무색했다. 그러니 반민특위 때문에 국민 분열이 생겼다고 주장하는 정치인도 있다. 그게 친일매국세력이다.

문제는 의식의 밑동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위안부’라는 말이 그렇다. 예전에 정신대라고 했다. 그 말은 국가의 위기에 목숨을 바쳐 싸우는 집단이라는 뜻이다. 일본인들에게는 카미카제 특공대다. 그 말이 민망해서 어느 틈에 위안부라는 말이 대체되었다. 더 화나는 말이다. 누가, 왜, 그리고 어떻게 ‘위안’한다는 말인가? 유엔과 제3자들도 엄연히 ‘전쟁성노예’로 부른다. 그런데 피해당사국이 ‘위안’ 운운할 수 있는가? 그게 정상인가? 그 말을 누가 쓰기 시작했는지 역으로 추적해보면 된다. 일본 우파의 지원을 받은 국내학자 특히 식민사관에 물든 작자들이 쓰기 시작하면서 은근슬쩍 대체된 말일 것이다. 아무리 감춰도 이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불편한 일본은 박근혜 정부와 ‘거래’해서 10억 엔으로 매수했다. 입 다물라는 뜻이다.

어떤 교육감이 있다. 한때 교사였다며 출마했다. 출마의 권리는 당연하나 참 뻔뻔하다 싶었다. 교사 그만 두고 사업가로 변신해서 그걸 발판으로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었다. 국회의원 시절 역사교과서 국정화 법안에 앞장섰다. 그걸 주장한 자들의 면면이 이른바 식민사관에 물들었다는 건 누구나 안다. 정권을 쥐고 있으니 반대의견 묵살하고 간단히 밀어부쳤다. 하지만 자신들의 이익에 맞춰 역사를 가르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게다가 식민사관에 바탕을 둔 저의가 얼마나 위해한지 아는 교사와 시민의 저항에 좌초되었다. 눈물겨운 투쟁이었다. 그러나 어쨌거나 거기 앞장섰던 자들은 대부분 좋은 자리를 얻었다. 그녀는 장관이 되었다. 그리고 한 일은 그 돈을 억지로 일본군강제성노예 피해자들에게 떠안기는 짓이었다. ‘여성’을 담당하는 부서의 장관이 할 짓은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반성은커녕 교육감에 출마했고 그걸 뽑아주었다. 선택은 유권자의 몫이다. 하지만 부끄러움은 알아야한다. 다음 세대의 교육을 담당한 자격이 되는지를 새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어차피 일본이 걸어온 싸움이다. 꼬리 내리면 진다. “싸워본 나라는 다시 일어날 수 있지만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 나라는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고 한 윈스턴 처칠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일본의 궁색한 변명은 국제사회에서도 비난받을 것이다. 명분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그게 외교력이다. 19세기말 동학혁명처럼 무참하게 패배해서도 안 된다. 힘들 것이다. 그러나 3ㆍ1독립운동 때 애국지사들이 겪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겨야 한다. 패배감에 고개부터 숙이는, 그걸 합리화하려는 뼛속까지 친일의 후예들과 잔재부터 털어내야 한다, 이참에.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위기는 분명 기회다. 친일 망령의 밑동부터 도려낼 기회다. 그래서 더욱 이겨야 한다. 우리 자식들에게 어떤 나라를 넘겨줄 것인가.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비장하지만 여유 있게, 담대하지만 세련되게 싸워야 한다. 그리고 이겨야 한다. 일본의 뻔뻔함과 더불어 이 땅에 기생하는 친일매국 세력을 이겨야 한다. 제2의 독립운동이다. 100년만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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