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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영의 화해] 트라우마로 남은 어릴 적 오빠의 성추행, 부모님께 얘기해야 할까요

입력
2019.08.05 04:4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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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어릴 때 오빠에게 성추행을 당한 뒤로 가족과도 갈등이 심해졌어요.’ 일러스트=김경진기자
‘어릴 때 오빠에게 성추행을 당한 뒤로 가족과도 갈등이 심해졌어요.’ 일러스트=김경진기자

초등학교 4학년 때였어요. 저보다 여섯 살인 위인 오빠에게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저를 잘 돌봐주고, 잘 놀아주는 오빠를 저는 무척 잘 따르고 좋아했어요. 그날 그런 오빠 방에서 같이 자겠다고 제가 우겨서 같이 잠을 잤어요. 새벽에 오빠가 일어나는 기척이 들어 저도 잠이 깼어요. 그런데 오빠가 제 속옷을 내리고 손으로 저를 만졌어요. 그때는 그게 성추행인지도 몰랐어요. 하지만 기분이 나빴고, 오빠가 잘못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오빠는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저를 대했고, 저도 말을 꺼내볼까 하다가 용기가 없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어요. 제가 어릴 때 오빠가 제 기저귀를 갈아줬다고 했던 엄마 말대로 그냥 기저귀 갈아주던 습관이겠거니 하고 넘겼어요. 그러고 1년 뒤쯤 우연히 성인사이트에서 오빠가 저한테 한 짓과 똑같은 모습의 사진을 봤어요. 그 이후로 남자가 무서워졌어요. 아빠가 어깨에 손만 얹어도 싫었고, 내 방에 노크 없이 들어오면 엄청 크게 화를 냈어요. 그때쯤 오빠는 집에서 따로 떨어져 고등학교를 다녔어요. 그리고 저는 그때 부모님과 갈등이 많았어요. 평범한 가정이었는데 부모님은 제가 고집이 세다고 시키는 대로 잘 안 해서 키우느라 힘들었다고 하셨어요. 저도 뜻대로 안 되면 많이 울었어요. 사춘기 때는 부모님과 거의 말을 안 했어요. 공부 얘기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가출한 적도 있고요. 간혹 엄마와 아주 소소한 일로 다퉈 비 오는 날 산으로 가출하기도 했어요.

어차피 오빠와는 떨어져 살아서 자주 볼일이 없었고, 그 기억도 차츰 잊혔어요. 그런데 고등학교에 가고 점차 성에 대해 알게 되면서 기억은 되살아 났어요. 오빠가 나한테 한 짓이 이해되지 않았고, 용서할 수 없었어요. 부모님한테 말해 볼까 많이 생각해봤지만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엄마는 저보다 오빠를 더 좋아했어요. 엄마는 대화하는 걸 좋아하는데 오빠는 말을 잘 하고 싹싹하거든요. 그에 비해 저는 말도 별로 없고, 시큰둥한 편이에요. 그래서 제가 말해도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을 위로받을 수 있을까 싶었어요. 가족과 남남이 될 것 같아서 무섭기도 했고요. 제가 느끼기에 집안 분위기가 썩 화목하지 못해 제가 말하면 정말 집안이 파탄 날 것 같았어요. 제 속은 타 들어 갔지만, 새벽 기도를 다니면서 화를 삭였어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 우울한 기분이 듭니다. 친구나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기에는 가족을 욕하는 것 같아서 입이 안 떨어지고요.

예전엔 그냥 가족을 안 보고 살면 그만이라고도 생각했는데, 이렇게 살면 후회할 것 같아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어쨌든 부모님은 이 사실을 잘 모르고 계시는데, 아무 이유 없이 부모님과 소원하게 지내는 것도 이상하고요. 제가 가족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김영희(가명ㆍ24세ㆍ대학생)


영희씨, 용기 내서 사연 보내 준 데 대해 뭐라고 고맙다는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오랜 시간 당신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사연을 보낼 때 상담의 위급성을 묻는 항목에 ‘위급하지 않다’고 답한 당신이 저는 매우 마음이 아팠어요. 당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요. 당신은 고통을 고통스럽다고 말하지 못하고, 그런 고통을 받아들이기조차 어려워하고 있어요.

영희씨, 성폭행과 성추행 피해자들은 모두 심한 고통을 겪습니다. 사람들은 성폭행과 성추행을 구별하지만 피해자들이 느끼는 고통에는 차이가 없어요. 성폭행과 성추행은 사람의 존엄성과 정체성을 훼손하는 매우 중대한 범죄이기 때문이에요. 성범죄에 있어서 피해자들은 철저하게 자기 주도성을 상실해요. 자기 주도성은 인생에서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스스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판단하고, 실행하고, 행동하는 걸 말합니다. 성범죄는 이런 인간의 자존감을 와르르 무너뜨립니다.

특히 가족이 가해자가 되면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성범죄 피해자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가족에게 당했을 때는 피해자 스스로 굉장히 많이 자책합니다. 상대를 마음껏 미워하고, 증오하고, 원망하기 어렵기 때문이에요. 영희씨에게 오빠는 믿고 의지할 수 있고, 좋아하는 대상이었어요. 그래서 오빠와 스스럼없이 같은 방에서 자겠다고 했겠지요. 영희씨가 다른 방에서 자고 싶었는데 억지로 자야 했다면 그렇게 만든 사람을 원망이라도 마음껏 했을 텐데, 영희씨는 원망할 상대조차 없었지요. 당신이 잘못한 게 전혀 없는데도 자책하고, 그 일로 가족의 불화가 일어날까 걱정스러웠을 거예요. 불화로 다른 가족이 겪을 고통까지 당신은 고려했을 거예요. 그래서 가족이 가해자인 경우 다른 가족에게조차 말을 하지 못합니다. 가장 가까운 대상인 가족을 가까운 사람들로 대하지 못하는 거지요. 끝도 없는 외로운 인생이라는 먼 길을 불안과 자책, 분노와 슬픔, 불신과 죄책감이라는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매달고 들고 끌면서 혼자 걸어가는 거지요. 대부분의 가족 성범죄 피해자들이 그래요.

영희씨, 당신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어요. 어린 당신은 당신보다 윗사람이나 부모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존재였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자책하고, 자괴감에 빠지고,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잊어버려야 할지, 말해야 할지, 무언가 결정했을 때 그 뒤에 일어날 수많은 가능성마저 혼자 고민하고 짊어져야 했어요. 그 시간이 얼마나 괴롭고, 불안하고, 두려웠을지 가늠해보면 당신이 너무나 가엾습니다. 가해자가 가족일 때 피해자의 불안은 더 커져요.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앞으로 가족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말했을 때 갈등과 불화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등의 모호한 불안이 당신을 엄습했을 거예요.

자신을 보호해 줬어야 할 대상자가 가해자가 됐을 때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신뢰와 인간에 대한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려요. 오빠에 대한 원망과 분노뿐 아니라 그 사실을 모르는 부모에 대해서도 불신, 적개심과 분노가 생깁니다. 부모가 모른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를 보호해 주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버려진 느낌이 들지요. 이성적으로 부모를 이해해도, 마음 깊은 구석에서는 부모에 대해 어쩔 수 없이 그런 감정이 듭니다. 그래서 아주 소소한 일에도 부모에게 버려진 것 같아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고, 거절당할 것 같아 감정 표현과 대화를 못하고, 소소한 일을 소소하게 대하지 못한 채 화를 냈을 수도 있어요. 누구나 마음 안에는 ‘나를 사랑하는 부모는 내가 말을 안 해도 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오빠와 잔다고 해도 부모가 알아서 따로 재웠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 부모는 도대체 오빠를 어떻게 키웠길래 저런 짓을 동생인 나에게 하는 것일까’하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어렸을 때 나쁜 일을 당할수록 실제 가해자보다 부모에게 더 분노와 적개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부모는 내가 말하지 못해도 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게티이미지뱅크
‘나를 사랑하는 부모는 내가 말하지 못해도 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게티이미지뱅크

영희씨, 성추행은 어린 당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보호받아야 했고, 어떤 누구도 절대로 해선 안 되는 행동이었어요. 어떤 사람들은 사춘기 소년의 실수쯤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 실수로 어떤 이는 인생이 와르르 무너집니다. 당신이 살면서 느꼈던 그 모호한 불안은 엄청난 일을 당한 당신에게 너무나 당연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감정이었어요. 당신이 잘못하거나 못나서가 아니라 당신이 당한 일은 어린 아이가 감당할 수 없는, 커갈수록 고통스러운 일이었어요.

흔히 성범죄 가해자는 피해자가 너무 어려서 기억을 못할 거라고 믿고 싶어 해요. 당신의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해자인 오빠가 진정한 사과를 하는 거예요. 오빠의 행동을 두둔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당신의 오빠도 너무나 미숙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지르고 스스로 당신에게 너무 미안하고, 죄책감에 시달렸겠죠. 그 사실을 밝히고, 당신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당신의 상처가 조금은 꿰매질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해자들이 어려서 기억을 못한다거나, 잠이 들어서 몰랐을 것이라고 자신을 속이고 뻔뻔하고 어리석게 살아가죠.

오빠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게 맞지만, 그렇지 않다면 영희씨가 스스로 말하는 게 중요해요. 그 일을 말 못하는 것은 두렵고 창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또 창피한 것 이면에 무의식적으로 자신에 대한 원망과 자책이 있지요. 오빠에게 ‘누구라도 나한테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일이었고, 나를 보호해야 하는 형제나 부모가 그런 일을 저지르는 건 절대로 해선 안 되는 범죄였다’고, ‘그 일로 나는 굉장히 고통스러웠고, 힘들었으며 이제서라도 당신의 진심 깊은 사과를 원한다’고 말하는 게 당신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회복하는 첫걸음이 될 거예요.

고통은 가해자가 줬지만, 회복의 길은 스스로 가야 해요. 그건 가족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롯이 당신을 위해서죠. 오빠에게 얘기했을 때 그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반응하는가에 상관없이 당신이 그 얘기를 꺼낸 것만으로도 당신은 자기 주도성을 회복하고 한 단계 나아갈 수 있어요. 오빠의 반응이 우리가 기대하는 반응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제게 이미 사연을 보낸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첫 발을 뗀 거예요.

‘힘들더라도 가해자에게 말하는 것이, 회복의 첫걸음이에요.’ 게티이미지뱅크
‘힘들더라도 가해자에게 말하는 것이, 회복의 첫걸음이에요.’ 게티이미지뱅크

오빠에게 직접 말하기가 어렵다면 편지를 쓰거나, 간접적으로 이 사연과 상담 내용을 오빠에게 보내는 것도 한 방법이에요. 얘기하면서 당신 스스로 감정이 정리되고, 상실됐던 자기 주도성을 되찾을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생길 거예요. 먼저 말을 꺼내는 게 너무나 어려운 결정이라는 걸 잘 압니다. 하지만 가족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이라서 참고 살아야 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오롯이 당신의 상처가 조금이나마 치유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부모와의 관계 개선은 조금 시간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스스로 당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마음의 준비가 됐을 때 얘기하는 게 좋아요. 부모에게 말을 꺼내서 상대의 반응에 당신이 더 상처를 입는다면 말을 꺼내지 않는 편이 낫지요. 영희씨, 당신이 다른 길을 선택하지 않고 여기까지 잘 왔다는 것만 해도 당신이 인생을 잘 살려고 애쓰고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사연을 보낸 당신의 용기에 진심으로 제 모든 정신적 에너지를 쏟아 격려를 보냅니다.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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