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아트센터서 개인전
사진 한 장 남기지 않고 떠난 어머니의 얼굴을 그리려고 처음 붓을 들었다. 간호사로 독일에 파견된 후엔 쓸쓸함을 이기기 위해 또다시 그림을 택했다. 그렇게 흘러간 세월이 50여년. 노은님(73) 작가에게는 많은 수식어가 붙었다. 독일 국립 함부르크 조형예술대 교수에 임용된 최초의 한국 여성 작가, 프랑스 중학교 문학 교과서에 작품이 실린 몇 안 되는 작가, 함부르크 알토나 성요한니스교회 속 스테인드글라스를 탄생시킨 작가. 올해는 하나의 기록이 더 생긴다. 오는 11월 독일 미헬슈타트 시립미술관에 노 작가의 이름을 딴 영구 전시관이 개관한다.
이렇게 거장으로 우뚝 선 노 작가의 작품 세계를 조망하는 대규모 개인전 ‘힘과 시’가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신작과 1980~90년대 대형 회화, 그의 작품 세계를 다룬 영상 등 30여점이 전시된다.
노 작가가 정식으로 회화를 배우게 된 건 나이 서른이 다 되어서다. 스물네 살이던 1970년 독일로 건너가고 몇 년 뒤의 일이다. 독감으로 결근한 노 작가를 찾아온 간호장이 우연히 그의 방에 놓인 그림을 보고 실력을 인정하면서 기회를 얻었다. 간호장은 생애 첫 전시회를 열어줬고 여러 언론에 기사가 실렸다. 기사를 본 함부르크 조형예술대의 한스 티만 교수 눈에 띄어 4년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입학했다. 미디어아트 선구자 백남준과 전위예술 거장 요셉 보이스도 이때 스승으로 만났다.
노 작가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는 ‘생명’이다. 그림에선 원시적인 냄새가 풍긴다. 아주 단순한 선과 색으로 이 세상에 있을 듯 없는, 독특한 생물체들을 그려 나간다. 올챙이 형태이지만 고래처럼 노랗고 큰 배를 부풀리고 있는 생물(달과 함께ㆍ2019), 달팽이 같지만 등껍질이 세모에다 목도 지렁이처럼 긴 생물(어느 봄 날ㆍ2019)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얼마 전 전시장에서 만난 노 작가는 “아프리카 여행을 네 번이나 다녀올 정도로 워낙 어렸을 때부터 원시적인 것을 좋아했다”며 “뭘 그리겠다고 다짐하고 그린 건 하나도 없다. 다만 요리를 하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내가 그린 그림을 닮은 채소나 곤충을 만날 때가 많아 스스로도 놀랍다”고 말했다.
백남준, 요셉 보이스 같은 플럭서스(1960~70년대 독일 중심으로 일어난 전위예술 운동) 작가들의 영향을 받은 만큼 1980년대 전후로는 퍼포먼스 작업에도 적극적이었다. 전시장에 상영되는 ‘내 짐은 내 날개다’(1989)는 노 작가가 나무, 잎, 흙을 활용해 선보인 퍼포먼스를 감독 바바라 쿠젠베르그가 촬영한 것이다. 영상 속에서 그는 나뭇가지와 종이로 만든 나뭇잎을 실제 나무에 매달거나 합판으로 만든 강아지를 끌고 산책에 나서면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꿈꾼다.
노 작가는 자신의 삶을 ‘낚시꾼’에 비유했다. “낚시꾼은 그저 바다에 나서서 많이 잡히면 잡히는 대로, 아니면 아닌 대로 다음 날을 기대하며 살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저 아침에 눈을 떠서 캔버스에 점 하나 찍는, 그 자체가 중요한 삶을 살죠.” 전시는 이달 18일까지 열린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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