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비영리 시민단체들이 외국 단체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국내 시민단체들은 형식상의 의사결정기구와 실제 의사결정기구가 다른 경우가 많다. 요컨대 총회나 이사회를 최고의결기구로 규정하고 있더라도 실제로는 집행위원회나 사무처 등이 그 단체의 의사를 결정하는 것이다. 최고의결기구는 형식적으로 승인만 한다. 오래되고 규모가 클수록, 그리고 사회운동 조직에서 시작된 단체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다.
일부 단체들은 조직 내 역할 분담이 명확하지 않은 상설기구들을 설치해 둔다. 운영위원회, 집행위원회, 자문위원회 등을 동시에 두는 식이다. 더 극단적인 경우를 말하자면 조직 구성이 총회, 공동대표단, 이사회, 상임이사회, 운영위원회, 집행위원회, 상임집행위원회, 중앙위원회, 자문위원회, 고문단, 사무총국, 사무처, 이런 식으로 마구 분리된 곳도 있다. 지부를 둘 만큼 큰 단체라면 본부와 지부의 체계가 얽혀 더 복잡한 조직이 된다. 여기에 각종 임시기구들까지 끼어들면 어느 기구가 어느 범위까지 결정하는지, 또 어느 기구가 단체의 자원을 분배하고 사업을 행하는지가 대단히 모호해진다.
추측컨대 국내 시민단체들에서 이런 조직체계가 나타나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겠다. 첫째는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에는 평범한 시민단체들조차도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곤 하였으므로, 안전을 위해 사회명망가들을 명목상의 대표와 임원으로 내세우고 실질 운영은 활동가들이 맡아서 하던 방식이 관습처럼 굳어진 것일 수 있다. 둘째는 시민단체의 임원들은 종종 무보수 명예직이므로, 그들로서는 단체의 일에 적극적으로 움직일 동기가 별로 없고, 따라서 상급기구가 작동하지 않으므로 이런저런 위원회가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떻든 의사결정기구가 명확하지 않거나 쪼개져 있을 때 생기는 문제는 작지 않다. 어떤 조직이 민주적이지 못하다면 누군가가 권력을 독점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구성원들이 민주적으로 합의할 장치가 없기 때문일 수 있다. 후자의 이유로,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하는 시민단체들이 방식에 있어서는 사회 평균보다 비민주적인 모습을 보이곤 한다. 때때로 이런저런 위원회들의 설치와 운영은 정관에 명시돼 있지 않고, 설령 명시돼 있다 해도 내규가 없거나 부실하다. 결국 회원들로부터 선출, 승인되지 않은 기구가 그 단체의 운영을 떠맡는다. 이를 나중에 고치기는 몹시 어렵다.
권한과 책임이 분명하지 않으면 의사소통이 어려워진다. 단체 내 기구마다 약간씩 다른 이야기가 전달된다. 또는 같은 이야기가 전달되었지만 서로 이해하는 바가 다르게 된다. 형식적 절차를 거쳐 새 프로젝트를 시작하려는데 사실은 아무도 동의하지 않은 채로 진행된다든지 하는 경우가 계속 생긴다. 그러면 온갖 뒷이야기가 떠돌고 구성원 간에 오해와 불신이 쌓인다. 아마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활동가 대부분이 이럴 때 가장 소진되었다고 느낄 것이다. 활동가들은 자신의 역할 범위를 판단하지 못하므로 위험을 줄이기 위해 최대한 보수적으로 일을 하게 된다. 이것이 시민단체에서도 관료주의가 나타나는 원인이 된다.
최근 서울시NPO지원센터가 주최한 워크숍에 다녀왔다. 여러 비영리단체 실무자들이 소속이 다름에도 비슷한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기 단체에서 누구와 상의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불합리한 조직체계와 운영방식은 구성원 개개인의 사명감이나 열정으로 극복할 수 없다. 시민단체는 일반 영리기업과 달리 직급과 서열을 만들기가 곤란하지만, 그런 것 없이도 단체가 잘 돌아가게끔 하는 기술이 있다. 하나는 실제로는 기능하지 않거나 역할이 겹치는 기구들을 모두 없애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하는 사람부터 후원하는 사람까지 더 많은 구성원이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손이상 문화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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