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였던 고 박병선 박사가 서고에서 발견한 금속활자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직지)은 이전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던 유럽 위주의 금속활자 발명사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전까지는 구텐베르크가 1455년 금속활자, 압축 인쇄기, 용지를 기록해 인쇄한 ‘42행 성서’가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여겨져 왔지만, ‘직지’에 찍힌 1377년 청주 흥덕사 발행이라는 기록이 인류의 인쇄 역사를 78년을 앞당긴 것이다. 이후 직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지정되면서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 직지라는 사실은 정설로 받아들여졌지만,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는 명예 이외에 다른 사실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장편소설 ‘직지’(전2권)는 직지와 구텐베르크 활자본 사이에 놓인 78년의 간극을 추적하며, 직지가 구텐베르크에 영향을 끼쳤고, 나아가 동방의 작은 나라가 유럽의 인쇄술과 인류의 가장 탁월한 문화유산을 이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라는 실존 인물을 등장시켜 남북한이 비밀리에 핵 미사일을 개발한다는 가정을 담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허구를 결합한 ‘팩션’(팩트+픽션)을 꾸준히 써온 작가의 호기심이 이번에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향했다.
이야기는 언어학자인 전형우 교수가 뱀파이어에게 당한 듯 목에는 이빨 자국이 난 채 귀가 잘려나가고 창에 찔려 사망한 사건에서부터 시작된다. 치정도, 금전문제도 없는 교수가 이토록 기이하고도 처참하게 살해당할 이유가 없다는 의문에 추적에 나선 기자는 그가 최근 직지와 관련한 연구 의뢰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1333년 교황이 ‘코룸’이라는 나라의 왕에게 보낸 편지를 토대로 국내 연구진 사이에 고려가 유럽에 금속활자를 전파했다는 가정이 세워졌지만, 전 교수가 이러한 주장을 정면 반박한 것이다. 기자는 국내 연구진의 미움을 산 전 교수가 그들에게 살해당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전 교수가 남긴 각종 단서를 되짚어나가던 기자는 살해되기 전 그의 마지막 행적이 국내가 아닌 프랑스로 향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교수가 생전에 미처 완수하지 못한 행적을 대신 따라가며, 기자는 아주 오래전 프랑스 아비뇽의 수도원에 머물렀던 조선에서 온 여성 카레나, 즉 은수와 만나게 된다. 1권이 현재 시점에서 전 교수 살인사건의 배후를 쫓는 방식으로 전개된다면, 2권은 은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15세기 조선과 유럽을 넘나들며 펼쳐진다. 소설은 ‘모든 백성이 읽고 쓸 수 있게 하겠다’는 애민정신으로 한글을 창제했던 세종대왕과, 사람들이 쉽게 글자를 대한다면 교회의 신성함이 무너질 것이라고 믿었던 교황청을 비교하며 종래에 ‘문자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예사로 넘나들면서 “직지가 구텐베르크에게 인쇄기술을 전파했을지도 모른다”라는 믿음을 심어주지만, 소설 속 내용은 어디까지나 가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티칸의 비밀 수장고에서 코룸이라는 나라의 왕에게 보내는 교황의 편지가 발견된 것이나, 최근 직지의 인쇄면과 구텐베르크 성경의 인쇄면을 전자현미경으로 비교한 결과 동일한 활자주조법의 특징이 보인다는 소설 속 일부 전제는 사실이다. 그러나 결국 중요한 것은 지식을 나누고 확산하고자 했던 앞선 인류의 공통된 노력 끝에 지금의 유산을 이룩할 수 있었다는, 가정이나 증명의 여지가 없는 단 하나의 진실 아닐까. “’세계 최고’같은 프레임에 갇혀서는 안 된다. 직지와 한글에 담긴 인류의 위대한 지성, ‘나보다 약한 사람과의 동행’이라는 정신을 보자”라는 소설 속 대사처럼 말이다.
직지(전2권)
김진명 지음
쌤앤파커스 발행ㆍ280쪽ㆍ각 1만2,600원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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