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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벼랑 끝에 서는 마음

입력
2019.08.02 04:4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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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경남 지역 삼성 노조설립위원장 활동으로 1995년 부당해고 당했다고 주장하는 김용희씨가 강남역 사거리 교통 폐쇄회로 고공 철탑에 올라 정년 전 복직을 요구하며 단식투쟁 중이다. 사진은 지난달 22일. 연합뉴스
경남 지역 삼성 노조설립위원장 활동으로 1995년 부당해고 당했다고 주장하는 김용희씨가 강남역 사거리 교통 폐쇄회로 고공 철탑에 올라 정년 전 복직을 요구하며 단식투쟁 중이다. 사진은 지난달 22일. 연합뉴스

밤새 뭇매를 치듯 세찬 비가 쏟아졌다. 벼락도 줄곧 이어졌다. 52일 전 ‘부당해고 인정과 복직’을 요구하며 서울 서초동 철탑에 오른 삼성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소속 김용희씨가 여전히 고공에 있던 시간이다. 어둠 위에 줄기차게 퍼붓는 비를 바라보며 김씨의 마음을 가늠하려다 고개를 저었다. 폭염과 장대비가 번갈아 오는 여름날, 50일 이상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철탑에서 홀로 한뎃잠을 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를 닮아있던 수많은 한국 사회의 노동자, 홀로 굴뚝과 철탑과 옥상 위로 향했던 이들의 몸과 마음에서, 이런 날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감히 짐작하자면 이렇다. 누더기가 된 한 장의 비닐 지붕은 있을지언정 그 안이 아늑할 리 없다. 건강한 사람도 들이치는 비를 1시간쯤 맞으면 온몸이 떨린다. 여름에도 오한과 고열로 치아가 딱딱 부딪치지 않으면 다행이다. 해가 쨍쨍하다고 사정이 나을까. 펄펄 끓는 철판과 쇠파이프의 열기는 전신의 물기와 함께 굳은 의지를 바싹 말린다. 동료들이 올려주는 얼린 생수병을 끌어안아 보는 경우도 있지만 이 시원한 위로의 유효시간은 30분을 채 가지 못한다. 새들도 이런 철탑에 둥지를 틀지 않는 건 이유가 있다.

더욱이 당사자가 단식투쟁으로 전신의 근육이 손상된 상태라면 고통은 더하다. 김씨는 모두의 만류로 단식을 중단했으니, 이제 배변 문제도 남았다. 작은 통에 용변을 해결하고 아래 쪽 동료들에게 내려 보낼 때의 마음은 또 어떨 것인가. 이렇게 고통 속에 의식을 잃어가든 말든 누군가는 자판을 두드려 댓글을 단다. “나 같으면 그 시간에 다른 회사를 알아보겠네. 머리가 나쁜가.”

누구의 이해력이 문제였을까. 정말 노동자들이 그런 고려도 없이 투쟁에 자신의 목숨을 건다고 믿는 걸까. 취재 현장에서 내가 본 인간은 그런 존재다.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느끼면, 쉽게 다른 일을 알아보는 대신, 아주 어렵게 평생을 거는 투쟁을 하는 존재.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누군가 폭력적으로 막는다고 느끼면 온 생애를 걸고 반발하는 존재. 국가와 공권력도 경청해주지 않으면 벼랑 위에 올라 초인적 싸움을 하고야 마는 존재. 동시에 이런 투쟁에는 인간에 대한 최후의 믿음이 깔려있다. ‘목숨이 걸린 일이 되면 한 번쯤은 돌아봐 주겠지’라는 믿음. 이 믿음이 자주 엇나가는 것이 한국 사회의 비극일 뿐.

물론 이런 극한 투쟁을 개인적으로 반대할 이유는 널렸다. 목숨을 거는 일은 늘 말려야 지당한 것이고, 다른 대안이 어쩌면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의 싸움이 힘겨워질수록 다음 사람은 더 길고 고된 투쟁을 감내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목숨을 건 투쟁이 늘어나는 게 오로지 노동자의 탓일까. 온 사회가 인간의 고통 앞에 둔감력을 발휘하게 된 게 어디 다 노동자들 탓일까.

제발 ‘고공농성의 기록’을 생중계하지 말아달라는 평론가가 있었다. 임태훈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융복합대학 교수는 깊은 한숨이 밴 목소리로 말했었다. “생각해보면 고공농성이라는 거, 실은 단 하루도 버티기 어려운 극한 투쟁이에요. 그걸 우리가 30일, 50일, 100일 하는 식의 숫자로 읽는 순간 이 투쟁을 이어가는 노동자는 더 위태로운 벼랑 끝에 내몰리잖아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릴 다른 실마리가 잡히지 않아 말문이 막혔다. 임 교수가 설명을 보탰다. “왜 자꾸 올라가겠어요. 한국에서 버림받고, 잊어지고, 극단적 폭력에 노출되고도 잊어진 풍경이 한둘인가요. 이런 망각의 영역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기억되기 위해 버티고 버티는 마지막 절취선이 ‘고공’인 겁니다.”

정상적인 대화와 교섭의 문이 활짝 열려있는데도 풍찬노숙을 자처하고 온 존재를 거는 사람은 없다. 극한 투쟁을 만드는 건 극한 불통이다. 이 사태에 책임이 있는 모두는 김용희씨가 올라선 철탑 밑에 달려가 말리고 설득하고 살려야 한다. 하다못해 달려가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전국의 굴뚝, 철탑, 교각에서 경신돼 온 고공농성의 슬픈 기록을 다시 깨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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