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발생 시 누구든지 구명환, 구명동의, 로프를 이용해서 인명구조 활동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폭우가 내린 지난달 31일 오전 서울 노원구 월릉교 부근 중랑천변에 설치된 인명구조함에 이 같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유사시 누구든지 쓰라는 문구와 달리 구조 장비는 누구도 꺼낼 수가 없다. 구조함이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기 때문이다. 관리 주체인 노원구청은 해당 구조함의 실태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이날처럼 큰비가 내린 지난해 8월 28일 이 인근에서만 1명이 물에 빠져 숨지고 2명이 다쳤다. 집중호우로 인한 사고 가능성이 높은 계절, 인명구조함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까.
인명구조함은 물놀이나 낚시 도중 발생한 사고로부터 인명을 보호하기 위해 해수욕장이나 저수지 등에 설치된 구조 장비 보관함이다. 수난 사고는 초기 대응이 중요한 만큼 전문 구조인력이 도착하기 전 신속한 구조 활동을 통해 인명 피해를 막겠다는 취지다. 서울 시내의 경우 집중호우 피해가 자주 발생하는 하천변이나 제방 등에 주로 설치돼 있다. 한국일보 ‘뷰엔(View&)’팀이 지난달 22일부터 중랑천과 우이천, 홍제천 등에 설치된 인명구조함 35개를 직접 살펴본 결과 절반 이상이 정상적인 구조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관리가 부실했다.
#인명구조보다 도난방지가 중요?
월릉교 사례처럼 자물쇠로 잠겨 있는 인명구조함은 중랑천에서 3개, 홍제천에선 5개나 더 발견됐다. 일부 구조함에는 전화번호와 함께 ‘비상상황 발생 시 아래로 연락 주시면 비밀번호를 알려드립니다’라는 안내문이 부착돼 있었다. 관리 주체들은 “구조 외 다른 목적으로 장비가 사용되는 것을 막고 분실을 방지하려면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일분일초’가 급한 상황에서 전화로 비밀번호를 확인하고 자물쇠를 여는 사이 구조 가능성이 줄어들 것은 뻔하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수상 인명사고의 대부분이 ‘골든 타임’을 놓쳐 사망에 이르기 때문에 누구나 곧바로 구조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관리 주체는 장비 도난이나 분실을 막자고 자물쇠를 채울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구조 장비를 활용할 수 있게 장비를 점검하고 개방해 둬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텅 비거나 부실하거나
인명구조함에는 보통 구명조끼와 구명환, 로프가 들어 있는데 상황에 따라 적절한 장비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일부 구조함의 경우 텅 비어 있거나 구명조끼 또는 로프가 빠져 있기도 했다. 관리자 연락처나 심폐소생술 방법은 물론 ‘인명구조함’이라는 안내 표시마저 찢기거나 지워져 시설물의 용도 자체를 알 수 없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 같은 부실 관리는 인명구조함의 존재감 상실로 이어진다. 지난달 25일 성동구 용비교 인근을 지나던 이경민(35)씨는 “자전거 타고 수도 없이 지나는 길인데 이런 장비가 있는 줄 몰랐다”며 “눈에 더 잘 띄도록 설치하고 관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밖에 외부 도색이 벗겨지고 녹슨 구조함, 상당 기간 열지 않은 듯 내부에 먼지가 쌓여 있거나 거미줄까지 친 구조함도 있었다.
#위치도 간격도 모양도 제각각
인명구조함의 설치 위치와 형태, 색상 등이 관리 주체에 따라 제각각이다 보니 유사시 한눈에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설치 위치만 봐도 자전거 도로나 산책로 바로 옆에 설치돼 있기도 하고 지역에 따라서는 하천에서 50~60m 떨어진 제방 위에 놓여 있는 경우도 있다. 구조함 사이의 간격 또한 일정하지 않아서, 200~300m 간격으로 비교적 촘촘한 지역이 있는 반면 수 ㎞에 걸쳐 단 한 개밖에 없는 곳도 있다. 하지만 인명구조함이 아예 없는 탄천이나 양재천, 안양천, 도림천 등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그 외에도 울타리나 도로 시설물 등으로 가려져 신속한 접근이 불가능한 경우도 4곳이나 됐다.
인명구조함은 관계 법령 중 해양경찰청 훈령 제130호 ‘연안사고 안전관리규정’에서만 유일하게 언급하고 있어 해경 관할을 벗어난 지역은 관련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 서울시 하천관리과 관계자는 “인명구조함에 대한 중앙정부 차원의 지침이나 기준이 없다 보니 각 구청에서 자체적으로 설치ㆍ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 교수는 “정부나 지자체가 관련 기준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 안전시설물 활용 매뉴얼을 제작하고 휴대기기 위치 정보 등을 활용해 관련 정보를 적재적소에 제공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박서강 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정예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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