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선배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대학시절 너에 대해 다른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기분 나빴던 적이 있어. ‘뭔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여울이한테 물어봐, 여울이라면 다 들어줄 거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더라고.” 사람들이 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지, 그때는 꿈에도 몰랐다. 나는 고분고분한 사람, 호락호락한 사람으로 비친 것일까. “여울이에게 이야기해봐” “여울이라면 다 들어줄 거야.” 남들이 뒤에서 나에 대해 그런 ‘뒷말’을 나누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시절 나는 누가 뭐래도 남의 부탁을 잘 들어주는 ‘예스맨’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저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 타인이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만족감을 얻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사실 거절하는 마음의 불편함을 참아내는 것이 어려울 뿐이었다. 나 스스로가 내 삶의 엑스트라가 되어버리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제 안다. ‘허락’이 나다움을 만들어주는 순간보다 ‘거절’이 나다움을 만들어주는 순간이 훨씬 많다는 것을. 마뜩잖은 부탁을 처음으로 거절하는 순간. 나는 진정한 나 자신이 되었다. 친구가 자신의 과제를 나에게 대신 써달라고 부탁할 때 나는 “안 되겠다”고 대답했다. 그 아이는 나에게 다시는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런 관계라면 처음부터 진정한 친구가 아니었던 것이다. 타인의 부탁을 들어줄 때 나는 아무런 대가를 바란 적도 없고 그냥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 좋았지만, 그 다음부터는 그런 소극적인 만족감을 삶의 울타리 바깥으로, 저 멀리 밀어내기 시작했다. 정신차리는 계기가 되었다. 내 삶의 주체성을 내가 찾지 않는 한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언제 내 인생의 진짜 주인공이 되는가.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때로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도 기꺼이 싸울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짜 나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닐까. 단지 힘들었다는 건 싸움의 증거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누구의 싸움’이냐, 누구를 위한 싸움이었느냐가 중요하다. 공부를 잘한다든지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내 안의 진짜 욕망이 아니다.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해냈더라도, 그 동기부여의 주체가 누구였느냐를 생각하면, 내 안에서 싹터 내 삶의 자양분으로부터 잉태된 욕망의 싹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조지프 캠벨의 ‘신화의 힘’을 읽으며 나는 내가 한 번도 내 안의 용, 즉 ‘너는 안 될거야’라는 두려움과 제대로 결투를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내 안에서 변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도 충분히 힘들었잖아. 너는 고생했잖아. 마음고생은 누구보다도 심했잖아.
하지만 변명의 소리, 앓는 소리를 하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에게 나는 잠시 조용히 하라고, 내 자신의 그림자와의 만남을 제발 방해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생각해 보니 정말 새로운 도전을 해본 적이 없었다. 부모가 둘러준 울타리 바깥을 나간 적 없었던 나, 한 번도 새로운 삶에 도전해보지 않은 나를 발견했다. 마침내 작가가 되는 길을 선택할 때, 내 안의 ‘부모의 시선’이라는 용과 싸워야 했다. 부모님이 좋아하시지 않는 길을 걸어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부모님이 그토록 반대하시는 일을 끝까지 해낼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내 안의 용과 싸워 이기고 싶었다. 내 안의 숨쉬는 작가의 가능성과 만나는 것은 곧 부모라는 용, 초자아(Superego)라는 내면의 감시자와 싸워 이겨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매번 새로운 글을 씀으로서 조금씩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만나는 모험의 과정이었다. 글을 쓸 때마다, 새로운 책을 낼 때마다 나는 내 안의 용과 싸운다. 그럼으로써 더 나은 나 자신, 더 깊고 지혜로운 또 하나의 나와 만나려고 분투한다.
개성화란 내 안의 더 큰 나와 만나는 것, 내 안에 숨겨진 나만의 신화를 살아내는 것이다. 내 삶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 그것은 내 인생의 주도권을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는 강인한 뚝심을 기르는 것이다. 내 삶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삶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용기를 한 순간도 잃지 않는 것이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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