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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마음풍경] 내 삶의 진짜 주인공이 되는 시간

입력
2019.08.01 04:4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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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반성. 길을 가다 볼록거울을 만났습니다. 평면거울에 익숙해진 탓인지 도드라진 거울을 보고 있자니 불쑥 자기 자신과 주변까지 돌아보게 됩니다. 서재훈 기자
자기반성. 길을 가다 볼록거울을 만났습니다. 평면거울에 익숙해진 탓인지 도드라진 거울을 보고 있자니 불쑥 자기 자신과 주변까지 돌아보게 됩니다. 서재훈 기자

한 선배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대학시절 너에 대해 다른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기분 나빴던 적이 있어. ‘뭔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여울이한테 물어봐, 여울이라면 다 들어줄 거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더라고.” 사람들이 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지, 그때는 꿈에도 몰랐다. 나는 고분고분한 사람, 호락호락한 사람으로 비친 것일까. “여울이에게 이야기해봐” “여울이라면 다 들어줄 거야.” 남들이 뒤에서 나에 대해 그런 ‘뒷말’을 나누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시절 나는 누가 뭐래도 남의 부탁을 잘 들어주는 ‘예스맨’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저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 타인이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만족감을 얻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사실 거절하는 마음의 불편함을 참아내는 것이 어려울 뿐이었다. 나 스스로가 내 삶의 엑스트라가 되어버리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제 안다. ‘허락’이 나다움을 만들어주는 순간보다 ‘거절’이 나다움을 만들어주는 순간이 훨씬 많다는 것을. 마뜩잖은 부탁을 처음으로 거절하는 순간. 나는 진정한 나 자신이 되었다. 친구가 자신의 과제를 나에게 대신 써달라고 부탁할 때 나는 “안 되겠다”고 대답했다. 그 아이는 나에게 다시는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런 관계라면 처음부터 진정한 친구가 아니었던 것이다. 타인의 부탁을 들어줄 때 나는 아무런 대가를 바란 적도 없고 그냥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 좋았지만, 그 다음부터는 그런 소극적인 만족감을 삶의 울타리 바깥으로, 저 멀리 밀어내기 시작했다. 정신차리는 계기가 되었다. 내 삶의 주체성을 내가 찾지 않는 한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언제 내 인생의 진짜 주인공이 되는가.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때로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도 기꺼이 싸울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짜 나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닐까. 단지 힘들었다는 건 싸움의 증거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누구의 싸움’이냐, 누구를 위한 싸움이었느냐가 중요하다. 공부를 잘한다든지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내 안의 진짜 욕망이 아니다.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해냈더라도, 그 동기부여의 주체가 누구였느냐를 생각하면, 내 안에서 싹터 내 삶의 자양분으로부터 잉태된 욕망의 싹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조지프 캠벨의 ‘신화의 힘’을 읽으며 나는 내가 한 번도 내 안의 용, 즉 ‘너는 안 될거야’라는 두려움과 제대로 결투를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내 안에서 변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도 충분히 힘들었잖아. 너는 고생했잖아. 마음고생은 누구보다도 심했잖아.

하지만 변명의 소리, 앓는 소리를 하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에게 나는 잠시 조용히 하라고, 내 자신의 그림자와의 만남을 제발 방해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생각해 보니 정말 새로운 도전을 해본 적이 없었다. 부모가 둘러준 울타리 바깥을 나간 적 없었던 나, 한 번도 새로운 삶에 도전해보지 않은 나를 발견했다. 마침내 작가가 되는 길을 선택할 때, 내 안의 ‘부모의 시선’이라는 용과 싸워야 했다. 부모님이 좋아하시지 않는 길을 걸어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부모님이 그토록 반대하시는 일을 끝까지 해낼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내 안의 용과 싸워 이기고 싶었다. 내 안의 숨쉬는 작가의 가능성과 만나는 것은 곧 부모라는 용, 초자아(Superego)라는 내면의 감시자와 싸워 이겨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매번 새로운 글을 씀으로서 조금씩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만나는 모험의 과정이었다. 글을 쓸 때마다, 새로운 책을 낼 때마다 나는 내 안의 용과 싸운다. 그럼으로써 더 나은 나 자신, 더 깊고 지혜로운 또 하나의 나와 만나려고 분투한다.

개성화란 내 안의 더 큰 나와 만나는 것, 내 안에 숨겨진 나만의 신화를 살아내는 것이다. 내 삶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 그것은 내 인생의 주도권을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는 강인한 뚝심을 기르는 것이다. 내 삶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삶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용기를 한 순간도 잃지 않는 것이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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