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가치를 응원합니다” 크라우드펀딩
“애초에는 작별인사라도 멋지게 해보자고 시작한 대회였습니다.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그렇게 많은 돈이 모일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차기 시즌을 개최하게 된 것은 순전히 팬들의 힘이죠.”
지난해 12월 게임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히오스)’의 프로게임 리그가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인기가 떨어지면서 대회 규모가 축소되는 것은 예상된 바였지만, 리그가 폐지된다는 소식은 선수나 관계자 누구도 미리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대회 해설을 담당하던 신정민 해설위원도 큰 충격을 받았다. 이대로 끝낼 수 없다는 생각에, 인터넷방송 플랫폼 아프리카TV의 지원을 받아 지난 3월 ‘마지막 대회’를 열기로 했다.
아프리카TV는 신 위원을 비롯한 대회 주최 측에 “대회 기간 중 시청자들에게 크라우드펀딩 형식으로 상금을 모금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해왔다.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3~4월 한달 여 진행된 대회 기간 동안 600명이 넘는 팬들이 크라우드펀딩으로 약 2,600만원을 후원한 것이다. 후원금이 1,000만원을 넘어가는 시점에 주최 측이 “1,500만원이 넘으면 리그를 부활시키겠다”는 ‘공약’을 내걸자 후원 열기는 한층 뜨거워졌다. 팬심은 결국 ‘마지막 대회’를 ‘새로운 대회’ 시즌 1으로 거듭나게 했다.
크라우드펀딩은 본래 ‘대중’을 의미하는 크라우드(Crowd)와 ‘자금 조달’을 뜻하는 펀딩(Funding)의 합성어다. 주로 자금력이 부족한 1인 창작자나 스타트업이 플랫폼을 통해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사업자금을 확보한 후 후원자들에게 약정된 제품을 전달한다. 히오스 리그 부활 공약처럼, 크라우드펀딩의 인기가 많아 사전에 설정한 최대 후원금 이상이 모이면 자금 수요자는 추가 보상을 내걸기도 한다.
지난 6~7월 진행된 새로운 히오스 리그의 시즌 2 대회는 상금 크라우드펀딩은 물론이고 스폰서(KB국민은행) 섭외까지 성공시켰다. 그렇다 해도 히오스 리그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규모는 다른 대회에 비해 작고 선수들은 더 이상 게임을 본업으로 삼기 어려운 형편이다. 하지만 신 위원은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히오스 리그에 대한 팬들의 성원을 느낀 덕에 우리들도 뭔가를 더 해야겠다는 긍정적인 에너지로 충만하다”며 “아프리카TV와 선수, 팬들 모두에게 도움을 받아 (대회를)계속해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청년 창업자, 펀딩 통해 스타트라인에 서다
크라우드펀딩은 젊은 창작자나 스타트업 창업자에게는 사업의 기반을 쌓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지난해 12월 ‘퓨어네코’를 설립한 1인 청년창업자 송성철 대표는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와디즈를 접하고 창업 기회를 잡았다고 말했다. 퓨어네코가 판매하는 ‘큐어스톤’은 자연 소재로 만들어 악취와 새집증후군을 유발하는 화학성분을 제거하는 효과가 있는 인테리어 소품으로, 모든 제품을 송 대표 본인이 손수 제작하고 있다.
송 대표는 건축업에 종사하는 장인어른의 영향으로 건축자재 개발 실험을 하다가, 왕겨숯과 패각(굴껍데기)을 조합한 친환경 건축재를 개발했고 2017년 특허 등록까지 마쳤다. 하지만 상품화는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타일 형식으로 제품을 만들어 건설 현장에 납품하려 했지만 기존 시장을 뚫고 들어가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소비자에게 더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다가, 직접 인테리어 소품을 만들고 와디즈에서 시험을 받아보자고 생각했어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한 달 정도 생산 분량으로 진행한 첫 번째 펀딩에서 준비한 상품이 모두 팔리는 ‘완전펀딩’에 성공하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펀딩 한도를 크게 늘린 2차 펀딩에선 1차의 25배 가까운 5,100만원어치 주문이 밀어닥쳤다. “크라우드펀딩이 아니라 일반 커머스 사이트에 입점했다면 막대한 홍보비를 써야 했을 거예요. 초기 자본금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창업 7개월 만에 5,000만원 넘는 펀딩에 성공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겠죠.”
송 대표가 본 크라우드펀딩은 소규모 창업자에게 최적의 플랫폼이다. 그는 “와디즈의 이용자는 완전히 새로운 상품을 선호하는 ‘얼리어답터’형 소비자기 때문에, 스타트업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지원하려는 성향이 강하다”며 “정성스러운 피드백을 받아볼 수 있어 실제 시장 판매와 다음 펀딩에 앞서 상품을 가다듬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펀딩 성공 이후 다른 온라인 상점과 사업체에서도 입점과 협력 제의가 오고 있지만, 송 대표는 당장은 추가 크라우드펀딩에 집중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처음 목표였던 건축재 쪽으로 나아가려 한다”며 “펀딩을 차근차근 성공시키면서 기업의 포트폴리오를 쌓다 보면 좋은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몰랐던 ‘취향 공동체’가 수면 위로
크라우드펀딩은 다양한 ‘취미 공동체’를 규합하고 활성화하는 효과도 발휘한다. 문화예술 분야의 1인 창작자가 많은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텀블벅’을 주로 이용하는 직장인 방원경(25)씨는 “텀블벅은 퀴어나 페미니즘 관련 상품이 많이 보이는 등 소수 가치에 열려 있고, 올라오는 상품이 다양하다”라고 말했다. 독립출판물 펀딩에 수시로 참여하는 학생 김지희(25)씨도 “일반적으로 서점에서 접하기 쉽지 않은, 마음에 드는 기획의 출판물이 나오기 때문에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TRPG(테이블톱 롤플레잉 게임)는 크라우드펀딩의 수혜를 입은 대표적 분야다. TRPG는 1명의 ‘마스터’와 서너 명의 ‘플레이어’가 모여, 각자 캐릭터를 맡은 플레이어들이 마스터가 제시하는 시나리오에 대응해 역할극을 하는 게임이다. 단 ‘룰북’으로 불리는 책에 나온 소재나 규칙에 맞춰서 이야기를 전개해야 하는 제약이 있다. 여러 명이 함께해야 하고, 룰북에 나온 규칙을 숙지해야 하고, 순발력도 필요하기 때문에 입문하기는 어렵지만 강력한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다.
1998년부터 롤북 등 TRPG 관련 서적을 번역해온 도서출판 초여명은 텀블벅에서만 열 차례 신간 출시를 위한 북펀딩에 성공했다. 특히 2013년 TRPG ‘던전 월드’ 한글 번역본 제작 크라우드펀딩을 성공하면서 책 발행건수 및 판매량이 크게 늘어나는 전기를 맞았다. 김성일 초여명 편집장은 “기존에도 서점에서 책이 꾸준히 팔리고 있었기 때문에 잠재된 독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크라우드펀딩의 폭발력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컸다”고 말했다.
초여명을 비롯한 여러 TRPG 전문 중소출판사는 이들 마니아를 결집시켜 결코 대중적이라 할 수는 없는 TRPG 출간 펀딩에 잇달아 성공했다. 김 편집장은 크라우드펀딩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엮이면서 홍보와 참여에도 큰 효과를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소 출판사는 홍보 기회가 적은데, 크라우드펀딩은 SNS와 연계해서 관심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집중적인 홍보가 가능합니다. 당장 펀딩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벤트를 통해 책 출간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북펀딩에 참여한 TRPG 유저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출판사와 게임 유저는 물론이고 유저들의 관계망도 강화됐다. 끼리끼리 모여 ‘특이한’ 취미를 즐기던 이들이 펀딩을 통해 공동체로 활동 영역을 확장한 것이다. 김 편집장은 “크라우드펀딩을 계기로 TRPG 시장은 수십 배 커졌다고 보면 된다”면서 “펀딩을 통해 번역본 출간이 늘면서 대형 출판사도 뛰어들었고 새로운 팬을 불러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크라우드펀딩 성공 열쇠는 ‘공감’과 ‘신뢰’
신정민 해설위원과 송성철 대표, 김성일 편집장은 모두 크라우드펀딩 과정에서 펀딩 후원자와 확실한 공감대를 만든 점을 ‘성공’의 비결로 들었다. 히오스 리그와 TRPG 크라우드펀딩은 특정 문화의 팬들이 성사시켰고, 큐어스톤 펀딩도 “이 기업가가 성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스타트업 지지자들의 도움을 얻었다. 크라우드펀딩 후원자는 단순히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자금을 필요로 하는 이가 제시하는 가치를 지원하는 것이다. 주소은 텀블벅 프로젝트 에디터는 “내가 이런 기획을 왜 하게 됐는지, 어떤 창작 활동을 이어나가고 싶은지 등 ‘스토리’가 잘 드러나야 후원자들도 결과물을 만들어냈으면 하는 마음에 후원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창작자가 공감을 이끌어낸다면 후원자들은 ‘열혈 지지자’가 되지만 그게 쉽진 않다. 예정금액 100%를 달성해야 성공으로 간주되는 텀블벅의 경우 전체 프로젝트의 62%만이 펀딩에 성공했다. 목표액 달성이 끝은 아니다. 펀딩 결과물이 예정보다 늦어지거나, 상품에 심각한 문제가 있거나, 상품을 받은 고객이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 펀딩은 실질적으로는 실패했다고 봐야 한다.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보드게임을 다수 후원한 경험이 있는 차제현(29)씨는 “지금까지 대부분의 상품에 만족했지만, 펀딩 결제 후 제품 발매가 연기되거나 실제 받아본 물건이 기대 이하일 위험도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크라우드펀딩에 성공한 창작자들은 후원자가 보내는 ‘신뢰’에 부응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송성철 대표는 “크라우드펀딩 서포터들은 스타트업의 상황을 이해하고 기다려 주는 이들이지만 거짓된 결과물에는 냉정하다“며 “정직해야 한다”고 말했다. 펀딩에 성공한 후라도 상품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여론이 급격히 나빠져 다시는 크라우드펀딩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잖다는 것이다. 특히 실망한 후원자가 직접 상품 홍보나 품질의 문제점을 파헤치며 창작자에게 타격을 주는 사례도 왕왕 발생한다.
크라우드펀딩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연결되는 소셜미디어적 성격이 강한 만큼 창작자와 후원자의 소통도 중요하다. 김성일 편집장은 “후원자가 과도한 기대를 하지 않도록 상품의 내용을 과장 없이 명확히 밝혀야 하고, 불가항력으로 일정 등의 약정을 지키지 못할 경우엔 손해를 감수하고 전액 환불 등으로 적극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소은 에디터는 “후원자 역시 펀딩 기간 내에는 언제든지 후원을 철회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창작자가 내놓는 진행 상황 업데이트를 수시로 확인하고 정보를 요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주소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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