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위비 증액 등 안보청구서만 놓고 간 볼턴
한일 갈등, 중러 도발 대응에는 원론적 태도
한반도 주변 정세 급변 대응 전략 점검해야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24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를 방문한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과의 접견에 앞서 함께 손을 잡으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반도 주변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근인(近因)은 아베 정권이 점화시킨 한일 갈등이다. 그 여파로 한미일 삼각동맹에 균열이 생겼다. 중국과 러시아가 그 틈에 무력 도발을 감행했다. 러시아 정찰기는 우리 영공까지 침범했다. 바로 그날, 북한은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탑재가 가능한 신형 잠수함을 공개했다. 어제는 단거리 미사일까지 발사했다.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부딪치는 중간 지점의 우리로서는 예기치 못한 난국이다. 미중 대립과 미러 갈등, 북미ᆞ남북 관계 교착 속에 북중러는 빠르게 뭉치는 반면 한일 파열음으로 한미일은 흔들리고 있다. 남중국해에서 진행된 미중 대결 전선이 중러의 군사협력 확대로 동해까지 확대될 조짐이다. 열강들의 패권 다툼에 한반도가 신냉전체제의 직접 영향권에 편입돼 가는 것이다. 냉철한 현실 진단과 치밀한 대응 전략이 절박하다.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한일 방문은 이런 절묘한 시점과 상황에서 이뤄졌다. 정부는 그의 입을 통해 미국의 더 적극적인 한일 갈등 중재 메시지를 듣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위 외교안보 당국자들과 만난 그의 발언은 원론 수준에 그쳤다. 한일 갈등에 ‘외교적 대화를 통한 해결’이라는 미국의 오불관언(吾不關焉)식 태도와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다.

볼턴 보좌관은 일본의 경제보복이 한미일 안보동맹의 균열로 이어지는 현실을 중러의 무력 도발과 북한의 위협을 통해 확인하고도 짐짓 모른 체했다. 그는 “앞으로 유사 상황에 대해 양국이 긴밀히 협의해 가자”는, 판에 박힌 언사만 했다. 미 국방부 대변인도 “한일 대응을 지지한다”는, 맥빠진 입장만 내놓았다. 느낌표를 기대한 우리에겐 물음표만 잔뜩 남은 꼴이다.

미국의 미온적 태도는 “함께 갑시다(We go together)”를 외쳐 온 동맹 정신에 비춰 보면 의아하다. 한일 갈등 해결과 한미일 협력 강화를 위한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실효적 조치나 행동은 보여 주지 않으니 말이다. 한미일 차관보급 3자 협의 제안이 유일하지만 일본에 보기좋게 거부당했다. 미일 밀착 관계를 감안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미국의 갈등 중재 및 해결 의지가 강했다면 어땠을까. 일본이 결코 외면하지 못했을거라 보는 게 합리적이다.

중러 무력 도발 반응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한일 갈등의 틈새를 노려 한미일 안보협력 대응 체계를 흔들려는 시도라는 것은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그렇다면 신속한 한일 갈등 중재ᆞ봉합으로 한미일 삼각동맹 복원에 나서야 할 텐데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한일 간 독도 영유권 문제가 부담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중러가 동해-남중국해 작전항로 개설을 통해 준군사동맹 관계로 치달으려는 심산임을 감안하면 보다 적극적인 개입을 시사했어야 했다.

미국의 납득하기 힘든 태도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트럼프 정부 ‘고립주의’ 외교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다. 볼턴 보좌관 방한 행보가 단적이다. 그는 한일 갈등, 중러 도발 등에는 적극 개입을 꺼리면서도 방위비 분담금 증액, 호르무즈 해협 파병 등 미국 이익 확대에 부합하는 ‘안보 청구서’는 테이블 위에 놓고 떠났다. 불난 집에 찾아와 도움을 주기는커녕 빚 독촉 하는 형국이다.

일본이 미국의 인도ᆞ태평양 전략에 가장 먼저 올라탄 것은 트럼프 정부 대외 정책의 본질을 꿰뚫은 결과다. 아베 정권은 트럼프 대통령이 F-35 전투기 설계기밀을 넘겨주겠다고 할 정도로 미국과 밀월 관계를 구축한 뒤 평화헌법 개정과 군사대국화를 향해 폭주 중이다.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대화 회피 등이 미국의 암묵적 양해 아래 이뤄진 거라는 의심도 무리는 아니다.

우리로서는 한반도 주변 정세 변화를 세심하게 점검해야 한다. 우리가 북한 비핵화에 외교력을 집중하는 사이 중국 러시아 일본은 동북아 세력 확장을 가속화하고 있다. 신냉전체제에 대응할 전략 마련이 시급하다. 단,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외교사의 교훈만큼은 잊지 말아야 한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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