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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C] 어느 가수의 쓴 웃음

입력
2019.07.25 17:21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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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C’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아이돌 록밴드 이스트라이트의 리더이자 드러머인 이석철이 지난해 서울 종로구 변호사회관에서 소속사인 미디어라인의 프로듀서로부터 폭행 사실을 폭로하며 울먹이고 있다. 양승준 기자
아이돌 록밴드 이스트라이트의 리더이자 드러머인 이석철이 지난해 서울 종로구 변호사회관에서 소속사인 미디어라인의 프로듀서로부터 폭행 사실을 폭로하며 울먹이고 있다. 양승준 기자

정준영ㆍ승리 ‘버닝썬 사태’부터 강지환 성폭행 혐의 구속까지. 원래 말 많고 탈도 많은 곳이지만, 올 상반기 연예계는 유독 사고가 잇따랐다. 연이은 충격에서 지난 1년을 되짚어보면 가장 아린 기억을 남긴 순간은 따로 있었다. 어느 10대 가수가 쓴웃음을 짓던 현장이다.

시기와 장소는 지난해 12월 서울 강남구 대치동 섬유센터빌딩. 아이돌 록밴드 이스트라이트 멤버였던 이석철ㆍ승현 형제의 소속사 PD 폭행 폭로 관련 일부 내용을 반박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충격을 준 건 두 형제와 그룹 활동을 함께 한 이 모씨의 말과 행동이었다.

“혼나고 있을 때 웃어 PD가 ‘왜 웃냐’며 (막대기로) 머리를 한 대 쳤어요. 아프지 않았는데 갑자기 피가 나더라고요.” 그는 자신이 피를 흘린 얘기를 웃으며 했다. 폭행 사건 관련 기자간담회에 나와 웃을 수 있다니. 자신이 당한 폭행이 대수롭지 않다고 확신할 때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이씨는 소속사에 ‘끌려’ 기자회견장에 나온 게 아니었다. 이씨는 “두 친구는 자신의 꿈을 선택하거나 포기할 수 있었지만, 저희는 갑자기 하루아침에 팀이 해체돼 버리는 상황을 겪었다”고 말했다. 연습생 100만 명 시대 ‘K팝 퇴직’의 공포였을까. 그에게는 그가 말한 ‘사소한 폭력’은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이미 ‘체(體)화’된 폭력이었다. 그에게 더는 질문을 할 수 없었다. 이씨의 웃음은 그래서 서글펐다. 대기업에 입사한 회사원들이 자신의 생산력을 증명하기 위해 매스 게임에서 기계화되려 몸부림치는 풍경이 떠올랐다. 법원은 이씨 형제를 때린 PD에게 아동복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2년의 실형을 최근 선고했다. PD의 폭행 수준이 낮은 게 아니었다는 얘기다. ‘가요계 미다스의 손’이라 불렸던 김창환 미디어라인엔터테인먼트 회장은 폭행 방조 혐의 등으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폭력에 둔감한 아이돌, 구조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기획사는 연습생에게 절대권력이다. 데뷔 기회가 전적으로 기획사에 달려있다. 기획사의 위압적인 행위에 연습생이 쉬 반발하기는 어렵다. 폭력에 길들여진 아이돌이 탄생하는 배경이다.

기형적인 음악시장의 단면이 이 것만이 아니다. 올해 데뷔 15년 차인 가수 A씨는 자신이 만든 노래 저작권 일부(양도가 가능한 저작재산권)를 시장에 내놨다. 음악 저작권 거래 사이트가 생겨서다. 창작자는 저작권 일부를 주식처럼 쪼개 시장에 내놓고, 소비자는 주식을 사듯 저작권 일부를 산다. 창작자와 그의 저작권 일부를 산 소비자가 곡의 저작권 소득을 나눠 갖는 것이다.

그가 저작권 일부를 팔아 받은 돈은 3,000만 원. 자신의 ‘몸’과 같은 저작권 일부를 떼어 판 이유는 음원 수입만으론 창작의 선순환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음원사이트에서 한 곡이 재생되면 가수에게 주어지는 돈은 0.42원. 헌데 국내 최대 음원 사이트인 멜론은 저작권료를 빼돌린 혐의로 최근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카카오에 인수되기 전 2009~2011년 ‘가짜 음반사’를 만들어 저작권료를 가로챈 혐의다. 사실이라면 ‘벼룩의 간’을 빼먹은 셈이다. 이쑤시개 가격보다 못하다는 저작권료를 받고 그마저도 중간에서 가로채기 당하는 상황에 놓였다면? 저작권 일부를 팔아 목돈을 마련하려는 가수의 행보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폭력에 둔감한 아이돌과 저작권 일부를 파는 가수의 등장. 여느 나라에선 좀처럼 보기 어려운, K팝으로 한류를 이끄는 지금 우리 음악 시장의 현주소다. 위압과 불투명으로 뒤틀린 음악 산업의 그늘이기도 하다. 요즘 가수 특히 K팝 아이돌그룹 얘기가 나오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너무 부자연스럽지 않아?” 우리가 만든 기이한 시장에서 뿌린 대로 거둔 게 아닐까.

양승준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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