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충무로 천의 얼굴 도금봉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들을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박찬욱 감독의 초기작 ‘삼인조’(1997)의 한 장면을 보면 반가운 얼굴이 카메오로 등장한다. 돈이 필요해 색소폰을 팔러 전당포에 들른 주인공들은 창살 너머에서 쏟아지는 전당포 노파의 날카로운 시선에 압도당한다. 도금봉(1930~2009)의 등장이다. ‘사람의 아들’(1980)과 ‘내시’(1986)에 출연한 이래 한동안 영화계를 떠나 있었지만, 왕년의 대배우는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내며 장면의 공기를 장악한다. 이 특별 출연이 배우 도금봉의 생애 마지막 연기가 되었다. 도금봉은 가히 천의 얼굴이라 불려 마땅한 연기자였다.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았고 팜파탈과 근대적 신여성, 지고지순한 시골처녀에서 표독스러운 악녀에 이르기까지 여배우가 할 수 있는 모든 스타일의 연기를 그 한 몸에 응축해냈다.
◇악극단에서 쌓은 연기 이력
도금봉은 1930년 8월 27일 인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정옥순으로 만주 룽징(龍井)의 광명여고를 졸업하자마자 악극단 창공에 들어가 연기자 생활을 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지일화(地一華)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 이 무렵에 관한 증언과 자료는 드물지만, 1959년 경인일보가 주최한 제1회 인천 출신 영화인 귀향 예술제에 초청되었을 때 “그 옛날 인천서 이름 높던 지일화예요”라 운을 뗀 것으로 미루어 무대에서부터 남다른 카리스마로 이름을 날렸음을 짐작하게 한다. 한국전쟁 때는 피란지인 전주에서도 극단 청춘부대에 들어가 연기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단장 이원철과 결혼해 그 사이에서 쌍둥이 아들을 갖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우 일로 바빠지면서 남편과 갈라선 도금봉은 1963년 10월 성장한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해 재결합하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못한다.
악극단에서 관록을 쌓아가고 있던 그녀가 영화배우의 길에 들어선 건 조긍하 감독의 ‘황진이’(1957)였다. ‘삼단 같은 거문머리를 비추 비녀에 말아 쪽 지고 치마를 비껴 처들고 오이씨 같은 보손발로 삽분이 들어서는’ 초대 황진이 도금봉은 관능적인 연기로 주목받았고, 서울 관객 3만5,000명을 동원하고 영화가 대만에 수출되는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다. ‘연산군’(1961)과 ‘폭군 연산’(1962)의 장녹수, ‘평양기생 계월향’(1962) 등으로 이어지는 팜파탈의 정체성은 데뷔작부터 일찌감치 정립되었던 것이다. 그 무렵 충무로에선 감독이 배우의 예명을 지어주는 일이 일종의 풍속이었다. 조긍하 감독은 황진이가 활동했던 송도(松都)의 도(都)에 가야금의 금(琴), 높은 산봉우리처럼 정상에 서라는 뜻에서 봉(峰)을 더해 도금봉(都琴峰)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리하여 정옥순은 일선에서 물러나는 날까지 배우 도금봉의 이름으로 평생을 살게 된다.
◇규수, 악녀, 소녀, 향단… 변신 또 변신
‘로맨스 빠빠’(1960)나 ‘삼등과장’(1961)에서 평범한 양갓집 규수인 도금봉을 보다가 ‘살인마’(1965)와 ‘목없는 미녀’(1966)의 서슬 퍼런 복수귀, ‘월하의 공동묘지’(1967)의 독살스러운 악녀를 접하면 이것이 동일한 배우의 연기라는 걸 믿기 어려울 것이다. 육체파 배우로 주목받았지만 도금봉의 진정한 무기는 특정한 배역을 꼬집을 수 없는, 다양한 역할을 한 몸에 소화하는 넓은 연기 스펙트럼이었다.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1957)에서 두 남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무희 역을 한 직후, 유현목 감독의 ‘그대와 영원히’(1958)에 와서는 양갈래 머리의 앳된 소녀로 분해 연인에게 설레는 마음을 고백하는 풋풋한 멜로 연기를 선보이며 극단의 성격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연기 변신을 보여 주었다.
윤봉춘 감독의 ‘유관순’(1959)에서는 능동적으로 독립운동을 조직하는 당차고 활기찬 모습의 유관순을 열연했는데, ‘내면적 공감은 못 주어’(동아일보 1959년 5월 31일 자) 아쉬운 평을 들었지만 ‘유관순’은 ‘코 무든 돈마저 동원하기에 이르러 세 살 난 어린애도 여배우 도금봉을 몰라볼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고맙지 않을 쏘냐’란 말이 나올 만큼 흥행에는 성공해 스타로서의 주가를 한껏 드높이게 된다.
신필름의 전속배우로 들어간 도금봉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의 식모 성환댁, ‘성춘향’(1961)의 향단 역으로 개성파 조연의 입지를 다지게 된다. 자매처럼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고 둘 다 향토적 미인상을 대변하는 얼굴이었지만, 도금봉과 최은희의 연기 성향은 사뭇 달랐다. 최은희가 정(靜)이라면 도금봉은 동(動)이었다. 최은희가 정숙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고전적인 한국 여성상을 대변했다면, ‘성춘향’의 도금봉은 거칠 것이 없는 입담과 행동의 서민적 활력으로 대비를 이루며 방자 역의 허장강과 더불어 감칠맛 나는 조연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신필름이란 마당은 도금봉에겐 너무 좁았다. 이 시기 도금봉은 주로 주인공인 최은희(신필름을 설립한 신상옥 감독의 아내)가 돋보이도록 뒷받침하는 역할에 매여 있었던 것이다.
◇김지미와 양귀비로 맞대결
김지미가 동방영화사의 ‘양귀비’(1962)에 출연을 결정하자, ‘천하일색 양귀비’(1962)를 준비하던 극동흥업에선 도금봉을 양귀비 역에 캐스팅했다. 한국영화 팜파탈의 지분을 양분하던 두 배우가 똑같이 양귀비를 맡아 경쟁하게 된 것이다. 서구적인 이목구비의 김지미와 토속미의 도금봉이 맞붙은 이 ‘양귀비 대전’은 ‘성춘향’과 ‘춘향전’(1961)이 승부를 겨루었던 ‘춘향전 전쟁’의 연장전이었다. ‘양귀비’의 최훈 감독은 홍성기 감독의 문하생이었고, ‘천하일색 양귀비’의 제작진은 신필름의 지원을 얻어 도금봉을 끌어왔다. ‘양귀비’ 측에서 김지미의 목욕 장면을 홍보하며 이목을 끌자, ‘천하일색 양귀비’ 측도 서둘러 도금봉의 목욕 장면을 찍는 등, 두 배우의 스타성 겨루기는 열기를 더해갔다. 설 연휴 대목을 노린 두 양귀비의 대결은 두 편 모두 각각 1,000만환의 손실을 기록하며 무승부로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효녀 심청으로 분했던 이형표 감독의 ‘대심청전’(1962)이 흥행에 실패한 뒤, 재계약을 거부하고 신필름을 떠난 도금봉은 연기 인생의 새로운 전기에 접어든다. 한동안 조연을 전전하던 설움을 풀기라도 하는 듯, 이봉래 감독의 ‘새댁’(1962)과 임원직 감독의 ‘부산댁’(1962)의 주연을 연이어 꿰찼고, 특히 ‘새댁’에서 순박한 눈망울의 시골처녀 연기로 제2회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조연상만 연거푸 받아왔던 도금봉으로선 첫 주연상의 영광이었다. 이듬해 도금봉은 인기 라디오 연속극 ‘행복의 탄생’을 영화화한 ‘또순이’(1963)의 주인공 또순이 역을 맡아 제10회 아시아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또순이는 파격적인 여성 캐릭터였다. 한국영화의 여성상이 십중팔구 전통적 윤리관에 복무하는 현모양처이거나 남자와의 관계에서 고통을 겪고 떠나는 멜로드라마의 비련의 여주인공이었던 시절, 독립적으로 자기 삶을 꾸리고 자수성가할 뿐만 아니라, 무기력한 남편까지 갱생시키는 또순이는 근대화의 첩경에 접어든 한국 사회에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했다.
◇은막 밖에서도 거침없던 사생활
‘진성여왕’(1964)이나 ‘산불’(1967)과 같이 성적 매력이 두드러지는 이미지로 출연할 때에도 도금봉의 배역은 능동적이었다. 시대 분위기에 움츠러들지 않고 욕망에 충실하려는 도금봉의 적극적인 여성상은 보수주의적 도덕과 윤리의 굴레 아래 억압되어 있던 여성들의 답답한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것이었다. 실생활에서의 도금봉도 배역과 다르지 않았다. 데뷔 초부터 염문을 뿌리고 다니기로 유명했는데, 그중에서 프로복싱 동양챔피언 강세철과의 염문이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새댁’이 개봉할 즈음엔 연하의 유명 배우와 동거하다가 관계를 정리한 일이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도금봉은 친한 여배우들을 모아 도박판을 벌이다 경찰에 적발되거나, 촬영장에서 안전 조치를 취하지 않는 영화사를 상대로 소송을 거는 등의 거침없는 행보를 보였다. 그때마다 세간의 곱지 않은 시선이 쏟아졌지만, 도금봉은 오로지 연기로 자신을 증명할 뿐이었다.
‘삼인조’를 끝으로 완전히 은퇴한 도금봉은 운영하던 복요리집을 정리한 뒤 세상과의 연락을 끊었다. 소식이 다시 들려온 건 2009년 6월 3일 서울 구의동의 복지시설에서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뒤였다.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말아달라”는 유언에 따라 조용히 치러진 장례였고 빈소에는 조화 하나 없었다고 한다. 한국영화의 고전기를 풍미했던 대배우의 쓸쓸한 퇴장이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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