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근조근 얘기해 봅니다. 작가들이 인정하는 산문가, 박연준 시인이 격주 금요일 <한국일보>에 글을 씁니다.
 <12>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영화 '연인'(1992).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연인’은 내가 열다섯 살 때, 친구 G의 방에서 처음 마주한 책이다. G는 아이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하는 아이, 친구가 나밖에 없는 아이였다. 발랑 까지고, 책이라면 모조리 읽어 치우고, 똑똑하고, 거짓말을 잘하고, 잘난 척하고, 외로운 아이였다. 열다섯의 G가 침대에 누워 ‘연인’을 읽다가,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속삭였다. “나, 아주 야한 거 읽어.” 우리는 괜히 부끄러워져 ‘꺅’하고 소리치고, 서로 밀치며 웃었다. 사랑은 야한 ‘행동’이란 걸, 두 사람을 자주 부끄럽게 한다는 걸 어린 우리가 알았을까? 그 책은 ‘물성’ 자체로도 힘이 있었다. 위험할 정도로. 열다섯의 나는 그걸 알았다. 스무 살이 넘은 후에야, 나는 조심스럽게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을 때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G가 떠오른다.

‘연인’은 마르그리트 뒤라스(1914-1996)가 노년에 쓴 자전 소설이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하고 싶은 얘기는, 내 나이 열다섯 살 반이었을 때의 얘기다. 메콩강을 나룻배로 건넜다. 그 영상은 강을 건너는 동안 줄곧 이어졌다. 내 나이 열다섯 살 반이었고, 그 나라에는 계절이 없었다. 우리는 오직 한철뿐인, 무덥고 단조로운 계절에 묻혀 있었다. 봄도 없고, 봄소식도 없는 지구의 긴 열사 지대에 살고 있었다.”(11쪽)

이런 서두는 심장을 빨리 뛰게 한다. 이제 곧 굉장한 비밀 이야기가 펼쳐지겠구나. 감당할 수 없이 깊고, 진한 이야기가 시작되겠구나. 프랑스 식민지령 사이공(현 호찌민)에서 강을 건너는 백인 소녀는, 자기보다 열두 살 많은 중국 남자와 마주친다. 생사(生絲)로 만든 원피스를 입고, 중절모를 비스듬히 눌러 쓴 채다. 1930년대 초의 일이다. 그들은 사랑을 한다. 사랑에 빠지거나, 사랑이 불러오는 부차적인 일들에 매이는 게 아니라, 그저 사랑을 ‘한다’. 그들은 사랑이 동사임을 아는 것 같다.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주변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그들은 자기들이 입은 옷이 사랑인 줄도 모른다. 모른 채 그들은 몸을 섞고, 대화를 하고, 주변의 조롱을 받고, 가족들의 비난과 무언의 부추김(그 중국인은 부자였으므로)을 받는다. 그들은 그저 몸을 섞는다. 마치 할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다는 듯이. 남자는 불안에 뒤척이며 자주 울고, 맹랑한 소녀는 담담히 자기 안의 욕망을 관찰한다.

“욕망을 외부에서 끌어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욕망은 그것을 충동질한 여자의 몸 안에 있다. 그게 아니라면 욕망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첫눈에 벌써 욕망이 솟아나든지 아니면 결코 욕망이란 존재하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27쪽)

 연인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ㆍ김인환 옮김 
 민음사 발행ㆍ153쪽ㆍ7,000원 

짐작하겠지만 이야기는 시작부터 끝까지 슬프고 독특하다. 뒤라스는 사랑으로 ‘곤두선 슬픔’을 그리는 방식에 있어 가장 독창적인 작가다. 누구도 뒤라스처럼 쓸 수 없다. 그의 글에는 음악이 흐른다. 음악과 함께 심오함, 재치, 말라비틀어진 시(건조하게 널어놓기에), 난해한 걸음걸이, 무엇보다 ‘조망의 시선’이 있다. ‘조망의 시선’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작가가 회상하는 대목을 쓸 때, 마치 모든 것을 알았다는 듯 쓸쓸히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하기 때문이다. 가령 화자를(뒤라스 자신이라고 알려진) “사덱의 근무지에 사는 어린 백인 창녀”(44쪽)라고 칭할 때. 혹은 “나의 삶은 아주 일찍부터 너무 늦어 버렸다. 열여덟 살에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늦어 버렸다.”(10쪽)고 회고할 때 그렇다. 그녀는 많은 일들을 겪고, ‘지쳐버린 신’처럼 이야기한다. 매혹적인 언술이다.

뒤라스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마치 ‘음표를 몸에 두른 여왕’처럼 우아하다. 그들의 이야기는 망설이며 ‘조금씩’ 움직이거나, 움직이면서 정지한 상태로 머문다. ‘연인’은 뒤라스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모데라토 칸타빌레’라는 소설을 가장 좋아하지만, 처음 읽는 사람에겐 ‘연인’을 먼저 추천하고 싶다.

박연준 시인

공감은 비로그인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