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피의 연대기’ 감독 김보람 
김보람 감독은 “생리를 하든 안 하든 선택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무엇인지는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영은 기자

“생리를 말하기 겸연쩍고 성적이고 감춰야 하는 것으로 느끼는 이유는 여자만 흘리는 피라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소년의 성적인 성장을 다룬 영화는 많죠. 아예 ‘몽정기’라는 이름을 대범하게 달고 나오기도 하고요. ‘나의 생리 출혈기’라는 영화가 나왔다면 어땠을까요?”

한 달에 한 번, 1년에 12번, 평생 400번 남짓. 이 세상 인구 절반인 여성이 겪는 생리 얘기다. 사실상 금기시된 생리를 다룬 최초의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를 찍고, 영화로도 못다한 이야기를 ‘생리공감’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낸 이가 있다. 여성의 몸과 생리에 대한 사회적 공감 확산에 기여한 공으로 이달 초 단체가 아닌 개인으로는 유일하게 ‘서울시 성평등상’을 받은 김보람(32) 감독이다.

최근 서울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 감독은 “작년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토크쇼에 참석해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미 뉴욕시처럼 무상 생리대 정책을 펴보면 어떻겠냐 제안을 했다”며 “이후 서울 시내 공공기관에 비상용 생리대를 비치하는 정책으로 이어졌는데,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이 열심히 한 일이지 사실 나는 별로 한 게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의 제안으로 시작된 서울시의 공공 생리대 지원 정책은 올해 유럽연합(UN) 공공행정상을 받았다. 공공기관 10곳에 비상용 생리대를 비치하는 시범사업으로 시작해 올해 200곳으로 확대됐다.

“우리가 길가다 뭘 쏟으면 화장실 휴지를 쓰지만 세금을 낭비한다는 생각은 안 하죠. 비상 상황이고, 당연하게 시민에게 제공된 거니까요. 그런 맥락에서 공공화장실과 휴지가 존재하는 만큼 시민 절반이 겪는 일이라고 하면 비상시에 사용할 수 있도록 (생리대를) 비치하는 건 상식적인 일이잖아요.” 생리대는 ‘화장실 휴지’ 같은 필수품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모르는 여성이라도 생리대를 빌려달라고 하면 돌려받을 생각 없이 선뜻 내어줄 정도로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일상의 불편이다. 그는 “갑자기 생리가 시작됐을 때 급한대로 비상용으로 쓰고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백업을 해주는 건 중요한 일”이라며 “남성들이 겪는 일이 아니다 보니 정책이나 법안을 디자인할 때 고려되지 않았던 것 뿐”이라고 꼬집었다. 비상용 생리대 비치는 당연한 시민의 권리인데, 젠더 이슈와 겹치면서 포퓰리즘으로 비춰지는 데 대한 안타까움도 드러냈다.

그가 생리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8년 전. “내가 원해서 흘리는 피도 아니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리는 피”라는 걸 처음 인식하면서다. 2015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네덜란드 친구 샬롯과의 만남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했다. 김 감독은 “초경 때부터 탐폰을 썼고, 만 18세 때 자궁 내 피임 장치를 삽입하는 시술(IUD)을 받아 생리를 안 한 지 12년이 됐다는 샬롯 얘기에 충격을 받았다”며 “동갑인데다 경제수준이나 교육수준은 비슷한데 생리나 피임에 대해 가진 정보는,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고 말했다. 세계 최초의 생리컵은 1930년대 이미 등장했지만 국내서는 2017년 12월에야 판매가 허가됐다. 왜 아무도 다른 방법이 있다고 알려 주지 않았을까, 왜 단 한번도 다른 방법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이 김 감독의 머릿속에서 똬리를 틀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서사’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생리를 하면서도 몰랐던 생리에 대한 이야기, 피의 연대기 같은 것 말이다. 김 감독은 “내가 겪지 않은 일을 흡수하기 가장 좋은 방법이 이야기이고, 그래서 우리 머릿속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왜곡된 정보를 밀어낼 새로운 서사, 콘텐츠가 많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생리컵 같은 문제에 있어 남녀 간의 인식 차가 너무 큰데 여성들은 생리대 파동부터 여러가지 사건·사고를 겪으면서 각성하고, 다양한 경로로 정보를 접하며 변해가는 반면 남성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성관념이 뿌리 깊은 이전 사회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고 덧붙였다.

김 감독의 고민은 ‘꼭 생리를 해야 하는 걸까’라는 질문까지 가닿아있다. 그는 “생리통이 심했던 지인 중 한 명은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공부에 방해가 돼 3년간 미레나 시술을 받아 생리를 중단한 후 시험에 붙고 나서 장치를 제거했고, 1년 만에 임신을 한 경우도 있다”며 “최소한 우리에게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 안다는 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피의 연대기 촬영 차 뉴욕에 방문했을 당시 우연히 만난 한 나이든 산부인과 의사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누구나 자신의 필요에 따라 (생리를 할지 안 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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