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패트 철회ㆍ정 국방 해임 등 요구 지렛대 활용
여 “日 경제보복 대응 야당이 발목” 지지층 결집
[저작권 한국일보]추경 국회 처리가 지연된 사례-박구원 기자

7조원대 추가경정예산안 처리가 기약 없이 미뤄지면서 여야 치킨게임의 출구가 보이지 않고 있다. 23일로 추경안이 국회로 넘어온 지 90일째. 역대 최장 처리기간(107일ㆍ2000년)을 넘기는 건 시간문제이고, 아예 처리가 불발될 가능성도 있어 ‘헌정 사상 최초로 추경안을 무산시킨 국회’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수도 있다. 정권의 중간평가 성격을 갖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추경을 통해 경제지표를 조금이라도 끌어올리려는 청와대와 이를 저지하며 정부의 경제 실정을 최대한 부각시키려는 한국당, 그리고 야당에 무작정 끌려 다니진 않겠다는 여당의 복잡한 정치적 셈법이 이번 ‘추경안 계류 사태’에 녹아 있다.

추경은 연말에 국회에서 정식 예산을 승인 받은 이후 대내외 여건에 변화(국가재정법상 대규모 재해나 자연ㆍ사회재난 혹은 경기침체나 대량실업)가 생겼을 때 긴급 투입하는 예산이다. 정부는 추경을 편성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매년 예산을 늘리고 있지만, 2000년 이후 5차례를 제외하고 매년 전가의 보도처럼 추경을 편성해왔다. 위기 대처 명목이지만 사회간접자본(SOC)이나 일자리 늘리기 예산도 슬쩍 끼워 넣는 탓에 경기 부양 효과가 만만치 않은 만큼 정부로서는 추경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다. 정부가 지난 4월 25일 국회에 제출한 6조7,000억원대(최근 추가된 일본 수출규제 대응 2,700억원 제외) 추경안이 집행되면 0.1% 안팎의 경제 성장률 제고 효과가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문재인 정부의 아킬레스건인 경제 실정을 부각해야 하는 자유한국당 입장에선 추경을 마냥 받아줄 수 없다. 총선에서 소득주도성장, 최저임금정책 등으로 악화된 경제지표를 들이밀며 ‘정권 심판론’으로 승부를 봐야 하기에 추경 규모를 최소화하거나 처리 시기를 최대한 늦춰야 한다. 한국당이 이번 추경에 단기 일자리 6만개 제공 등 4조5,000억원 규모의 경기부양 예산이 포함된 점을 들어, ‘총선용 추경’으로 규정하면서 재해추경만 처리하겠다고 강조하는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여당이 추경 처리를 포기하지 않자 자신들의 정치적 요구를 관철할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 4월 말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 대치 정국이 끝나자 여당에 패스트트랙 강행 사과와 철회를 요구했던 한국당은 문재인 정부 경제실정 토론회 개최, 북한 목선 입항사건 국정조사와 정경두 국방부 장관 해임안 처리 등을 추경 처리를 위한 조건으로 연이어 내놓고 있다.

추경 처리에 사활을 걸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은 한때 야당 설득에 적극적이었지만, 최근엔 일본 수출규제 조치 대응을 위한 예산이 추경에 추가하면서 분위기 반전을 노리고 있다. “한국당이 일본 통상보복 대응을 위한 추경에 발목을 잡는다”고 여론전을 펼치며 지지율을 끌어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22일 공개된 여론조사에선 문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는 8개월 만에 최고치를 찍은 반면 한국당 지지율은 폭락했다. 여당 내부에선 한일 대치가 격화하는 상황에서 추경 처리에 비협조적인 야당이 비판 여론에 부담을 느껴 입장을 바꿀 것이란 기대도 있다.

여당 입장에선 또 추경 집행을 위한 ‘골든타임’을 놓친 상황에서 더 이상 야당에 끌려 다닐 필요가 없다는 계산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추경 처리 적기였던 올해 상반기가 이미 지난 만큼, 한국당이 요구하는 조건을 수용하면서까지 정치적 타협을 하는 전례를 만들지 말자는 것이다. 한국당이 요구하는 북한 목선 입항사건 국정조사나 정경두 장관 해임안을 본회의에 올렸다가 정국 주도권이 야당에 넘어갈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됐을 수 있다. 다만 민주당 관계자는 “골든타임을 놓친 것은 맞지만, 아무리 늦어도 안 하는 것보단 낫다. 추경을 포기하겠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고 강조했다.

정승임 기자 choni@hankookilbo.com

정지용 기자 cdrag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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