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한일 관계의 앞날은 지뢰밭이다. 일본은 ‘화이트리스트’(안보상 우호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할 태세고, 우리 정부는 맞대응 성격으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재검토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안보 영역으로까지 갈등이 번지며 사태가 장기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다만 미국이 한미일 삼각동맹 차원에서 양국 갈등에 관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만큼, 두 나라가 외교적 해법을 찾기 위해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관측도 나온다.
화이트리스트 배제 vs 지소미아 폐기
한일 관계는 당분간 ‘강 대 강’ 대치 국면을 벗어나긴 쉽지 않아 보인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문제 삼으며 “한국이 먼저 답을 가져와야 한다”는 일본과 “대(對) 한국 수출규제 조치 철회가 먼저”라는 우리 정부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 있기 때문이다.
한일 관계의 앞날을 좌우할 첫 번째 고비는 이달 말로 예상되는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 결정이다. 일본이 전략물자 수출 때 통관절차를 간소하게 하는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할 경우, 100여개의 핵심 소재ㆍ부품이 수출규제 영향권에 들게 된다.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 등 3가지 품목에 국한된 1차 수출규제 조치와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일본 정부는 24일까지 일본 내 의견을 수렴한 뒤 각료회의에서 화이트리스트 제외를 최종 의결할 계획이다. 각료회의를 통과하면 21일 안에 효력이 발생하게 돼, 이르면 8월부터는 2차 수출규제가 현실화 할 수 있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도 19일 열린 문 대통령과 여야 5당 대표 회동에서 “일본이 7월 31일 혹은 8월 1일에 화이트리스트 배제 발표를 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보고해, 일본 정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다음 고비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폐기 통보 시한인 8월 24일이다. 우리 정부는 일본이 화이트리스트 배제를 강행한다면 협정 재검토로 맞대응 하겠다는 방침이다. 2016년 11월 발효된 이 협정은 유효기간 1년으로 만기 90일 전 한일 양국이 이의제기를 하지 않으면 자동 연장된다. 청와대는 협정 자동연장 문제를 일본의 무역제한 사태와 연결하는 방안을 ‘옵션’으로 고려하고 있다.
유엔 총회, 일왕 즉위식 변곡점 될까
이처럼 양국 갈등이 악화일로에 있지만, 외교적 해법을 찾으려고 손을 맞잡을 기회도 있다. 먼저 10월 22일로 예정된 나루히토(徳仁) 일왕 공식 즉위식이 꼽힌다. 일본 정부는 이 행사에 190여개국 정상을 포함해 2,000여명의 귀빈을 초청할 계획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웃나라인 한국이 빠진다면 체면이 서지 않을 수 있다.
우리 정부도 즉위식을 계기로 대일 특사 파견 등을 통해 돌파구 찾기에 나설 수 있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기자 시절 도쿄 특파원을 지낸 이낙연 국무총리의 특사 파견 가능성이 꾸준히 거론되고 있다. 일본도 ‘특사 카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나가미네 야스마사(長嶺安政) 주한 일본대사는 최근 윤상현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일왕 즉위 전까지 특사를 보내야 한국도 축하 사절단을 보낼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왕 즉위식에 앞서 9월 열리는 유엔 총회도 분기점이 될 수 있다. 특히 한미일 정상이 한자리에 모이는 만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일 관계의 중재자를 자처하며 나설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19일 문 대통령이 일본의 수출제한 조치와 관련해 중재를 요청한 사실을 공개하며 “양국이 원하면 관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양국이 가을을 넘겨서까지 외교적 해법을 마련하지 못할 경우 갈등은 장기화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배상 문제를 둘러싸고 압류한 일본 기업 자산에 대한 매각 절차를 시작한 만큼, 그 결과가 나올 연말쯤이면 한일 갈등은 최고조에 달할 전망이다. 자칫 문재인 정부 내에 한일 관계 회복은 요원해질 수도 있다.
이동현 기자 na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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