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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일본 반도체 패전의 교훈

입력
2019.07.23 19: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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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이 1971년에 D램 메모리 반도체를 발명한 이래 미국은 10년 이상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도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대형 전산장비에 들어가는 D램 수요가 증가하면서 소위 반도체 빅5로 통하던 일본의 도시바, NEC, 히타치, 후지쯔, 미쓰비시 등이 이를 뒤집었다. 당시 일본업체들은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80%, 비메모리 반도체까지 포함한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일본업체들은 장비, 소재까지 모두 국산화해 수직 계열화를 완성했다. 특허가 연간 1만건 이상 쏟아져 나올 정도로 일본업체들은 기술 개발에도 적극적이었다.

권불십년(權不十年), 하지만 일본 반도체 산업의 전성기는 10년 남짓이었다. 1990년대 들어 개인용 컴퓨터(PC)가 증가하며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1998년 삼성전자 등 한국의 반도체 업체들이 가격 경쟁력에서 일본을 제치고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 1위를 차지했다. 그 결과 일본업체들은 낸드플래시를 만드는 도시바를 제외하고 모두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철수했다. 더 이상 일본은 스스로 D램을 만들지 못한다.

후발 주자인 한국업체들이 어떻게 일본 천하였던 반도체 시장을 뒤집을 수 있었을까. 16년간 일본의 히타치, 엘피다 등 주요 반도체업체에서 개발자로 일한 유노가미 다카시 미세가공연구소장은 2011년 출간한 ‘일본 반도체 패전’이라는 책에서 일본이 아집에 사로잡혀 독자 노선을 걸었던 반면 한국업체들은 국제 분업을 적절히 활용해 생산력에서 승리했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당시 일본 반도체업체들은 비용 상승에도 불구하고 일본 장비업체들에게 전용 장비를 따로 주문했다. 반면 한국 반도체업체들은 일본보다 열세였던 유럽업체의 장비들을 도입해 상대적으로 낮은 비용으로 반도체를 생산했다. 그때 삼성전자와 함께 성장한 업체가 노광장비를 만드는 네델란드의 ASML, ‘Exelan’이라는 드라이 에칭 장비를 만들던 램리서치사였다.

덕분에 ASML은 2001년에 반도체 장비 중 가장 비싼 노광장비 분야에서 일본의 니콘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랐다. 이후 ASML은 삼성전자의 필요에 따라 공정을 단축할 수 있는 장비들을 공급했다. 일본 장비와 재료를 고집한 일본 반도체업체들은 생산비를 떨굴 수 있는데도 Exelan을 도입하지 않았다. 결국 일본 반도체업체들이 무너지면서 일본 장비업체들도 함께 쇠락했다.

오늘날 일본이 반도체 소재에 집중한 것은 글로벌 분업체계에 편승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뒤집어보면 글로벌 분업체계를 적절히 이용한 우리 반도체 업계의 승리이기도 하다. 이후 일본은 정부에서 보조금을 지급해 미국에게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당한 ‘아스키 프로젝트’ 등을 추진하며 전멸당한 반도체 생산력을 부활시키려고 10년 이상 노력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를 통해 일본은 글로벌 분업체계에 편승하지 않으면 반도체 소재마저도 건사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배웠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폴 데이비드 교수는 반도체를 일반 범용 기술 제품으로 봤다. 즉 ‘산업의 쌀’이라는 표현처럼 반도체는 한 국가가 아닌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제품이라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이 반도체 소재의 한국에 대한 수출을 제한한 것은 일본 산업 전체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유노가미 소장도 최근 일본 전문지 EE타임즈 기고를 통해 이번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를 일본 정부가 스스로 무덤을 판 행위라고 비판했다. 그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LG전자 등 한국업체들이 장비와 소재 분야에서 앞으로 일본을 빠르게 배제하고 대체재를 찾을 것”이라며 “일본은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지금이라도 일본은 반도체 패전의 역사에서 얻은 공존공생의 교훈을 상기해야 한다. 더 이상 한국의 반도체 업체들이 공격이나 경쟁 상대가 아니라 함께 성장해야 할 대상이라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최연진 IT전문기자 wolfpac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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