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사의재 서당 
다산이 황상에게 준 '삼근계'를 아들 정학연이 다시 옮겨 쓴 친필. 정민 교수 제공
 ◇아! 삼근계(三勤戒) 

내제자 황상을 들인 뒤로 다산의 생활에 활기가 생겼다.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다가 곁에서 심부름을 해 줄 손길을 얻자 숨이 트였다. 황상은 듬직하고 신실했다. 묵묵히 먹을 갈고 베껴 쓰며, 정돈하고 청소했다. 종일 가도 말 한마디 할 일 없던 적막하던 방안에 사람의 기운이 돌았다.

황상이 다산의 방에 머문 지 7일째 되던 날인 1802년 10월 17일, 스승은 제자에게 오늘부터 문사(文史)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자고 말씀하셨다. 황상이 쭈뼛대며 스승에게 물었다.

“선생님! 제게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첫째 너무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꼭 막혀 융통성이 없습니다. 셋째는 답답해서 고지식합니다. 이런데도 제가 공부할 수 있을까요.”

다산이 빙그레 웃고 말했다.

“보통 공부하는 사람이 지닌 문제가 세 가지다. 첫째는 민첩한 것이지. 머리가 좋아서 금방 외우는 아이는 제 머리를 믿고 대충 외우고 만다. 그때는 분명히 외웠지만 돌아서면 잊고 말지. 둘째는 예리한 것이다. 글짓기에 재질이 있어 금방 글을 잘 짓지만 차분하지 못해 글이 들뜨고 만다. 셋째는 재빠른 것이지. 무슨 말을 하면 말귀를 금세 알아들어 다 아는 체를 한다. 그렇지만 투철하게 알지 못하고 거칠게 아는 데 그쳐, 끝내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그런데 네게는 이런 문제가 하나도 없구나. 둔하다고 했지? 둔한데도 들이 파면 끝내는 구멍이 뻥 뚫리게 된다. 앞뒤가 꼭 막혔다고 했니? 막혔던 것이 한번 터지면 그 성대한 흐름을 걷잡을 수가 없단다. 답답하다고 했지? 답답한데도 쉬지 않고 연마하면 마침내 아주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

소년은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지는 스승의 말씀에 정신이 다 황홀해졌다. 스승의 말씀이 이어졌다.

“막힌 것을 뚫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히 하면 된다. 틔우는 것은? 부지런히 하면 된다. 연마하는 것은 어찌해야 하겠니? 부지런히 하면 된다. 부지런히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병심확(秉心確), 즉 마음을 확고히 다잡으면 된다. 그렇게 할 수 있겠지? 어기지 않을 수 있겠지?”

소년은 안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솟아 나와 저도 모르게 그만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부자 같은 사제간 

이것이 앞서 몇 차례 다른 글로도 소개한 바 있는 다산의 ‘삼근계(三勤戒)’의 내용이다. 황상은 저처럼 머리 나쁜 아이도 공부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스승은 바로 너 같은 아이라야 공부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제 머리를 믿고 노력 않는 헛똑똑이 말고, 제 재주를 과신해 나부대는 까불이도 안 되고, 눈치만 빠르고 몰두하지 못하는 덜렁이도 안 된다. 꼭 너 같은 아이라야 비로소 공부할 수 있다고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 한 번의 말씀에 소년의 인생이 문득 변했다. 스승은 이날의 문답을 아예 글로 써서 황상에게 선물했다. 황상은 감격해서 “뒷부분의 말씀은 어떤 바보라도 스스로 힘을 쏟아 따르기를 원하게 할만했다”고 썼다. 이후 60년간 황상은 스승의 이 말씀을 읽고 또 읽었다. 나중에는 종이가 나달나달해져서 찢어지고 갈라졌다. 스승이 세상을 뜬 뒤 황상은 다산의 맏아들 정학연에게 같은 글을 한 번 더 써 달래서 받아 간직했다. 이 글씨가 지금 남아있다.

한가한 어느 날 다산이 황상에게 문득 뜬금없는 말을 했다. “듣거라. 내가 다시 상경하지 못하고 이 땅에서 늙어 죽거든, 두 아들은 모두 천 리 밖에 있으니, 염습하는 절차는 오직 네가 집행해야 한다. 옷을 입힐 때도 더러운 것은 빨고, 깨끗한 것은 그대로 입혀다오. 한결같이 내 ‘상례사전(喪禮四箋)’에 따라서 염습하여 관에 넣고, 두 아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널에 얹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절차를 갖춰다오. 적막하게 지낸 지가 오래다 보니 구멍 난 베 사이로 구슬이 새는 것과 같아 어느 하나 제대로 수립한 것이 없다. 되풀이해 자신에게 구하고 주선해서 정 아무개 문하의 제자라 일컫기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황상에 대한 다산의 애정이 이러했다. 이 사연 또한 황상이 정학연에게 보낸 ‘상유산선생서(上酉山先生書)’에 실려 있다.

사의재. 정민 교수 제공
 ◇네 가지의 마땅함을 익히는 집 

다산이 내제자를 받았다는 소문이 강진 고을에 금세 퍼졌다. 이때쯤 해서는 주변의 경계하는 눈길도 한층 누그러진 터였다. 이따금 왕래하며 말을 섞던 아전들이 하나 둘씩 제 자식도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넣었다. 황상도 제 아우 황경(黃褧)과 사촌 황지초(黃之楚ㆍ1793~1843)를 거두어 달라고 청했다.

다산으로서도 더 이상 고향 집에 손을 내밀기가 어려웠다. 제 앞가림이라도 해야 면목이 설 듯했다. 또 어차피 가르칠 바에야 여럿을 함께 놓고 가르치는 편이 서로에게 경쟁도 되고 나쁠 것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내제자를 하나 들여 곁에 두려던 계획이 틀어지고, 주막집 골방이 어느 순간 서당으로 변했다. 길손들이 밥 먹다 말고 책 읽는 소리를 들었다. 술을 마셔 목소리가 올라가다가도 문득 목소리를 낮추었다. “별 희한한 주막을 다 보는군.” 사람들이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씩 하면서도 싫지만은 않은 눈치였다.

다산은 내친김에 서당에 사의재(四宜齋)란 현판을 내걸었다. 네 가지 마땅함을 추구하는 집이란 의미였다. 그 네 가지가 무얼까? 첫째, 생각은 맑아야 한다(思宜澹ㆍ사의담). 생각이 맑지 않거든 재빨리 맑게 해야만 한다. 외모는 장중해야 한다(貌宜莊ㆍ모의장). 장중하지 않을 경우 빠르게 무게를 되찾아야 한다. 말수는 적어야 마땅하다(言宜訒ㆍ언의인). 과묵하지 못할 때면 서둘러 이를 그쳐야 한다. 동작은 묵직해야 한다(動宜重ㆍ동의중). 묵직하지 않으면 바로 행동을 늦춰야 한다. 그러니까 사의재는 맑은 생각과 장중한 외모, 과묵한 언어와 묵직한 몸가짐을 배우고 실천하는 집이란 의미였다.

공부하는 사람은 생각이 맑아야 한다. 그러면 외모에 무게가 깃든다. 말수가 적어지고 몸가짐이 들뜨지 않는다. 공부를 하고도 언행이 이 같지 않다면 그것은 헛공부다. 다산의 교육목표가 이렇게 제시되었다. 다산의 ‘사의재기(四宜齋記)’에 나온다. 다산은 집 앞에서 공차며 놀던 아무것도 모르는 촌 아이 대여섯을 모아놓고 평생 처음 해보는 훈장 노릇을 시작했다.

 
 ◇묵은 인연의 경로 

인연의 길이 참 묘하다. 25년 전인 1777년 16세의 다산은 화순 현감이 된 아버지를 따라 화순으로 내려갔었다. 아버지 정재원은 임지로 내려가던 도중 공주(公州) 신점(新店)에서 강진현감 이유문(李孺文)과 우연히 만났다. 둘은 원래 가깝게 지내던 벗이어서 예상치 못한 상봉에 기뻐 소리를 지르며 술잔을 나눴다. 두 사람은 이후 전주까지 동행했고, 이유문은 정재원에게 임기 중에 강진을 꼭 들러가라는 당부를 두고 헤어졌다.

이듬해 1778년 봄, 정재원은 둘째 아들 정약전을 데리고 바람을 쐴 겸 강진 쪽으로 나들이를 했다. 순천 송광사로 내려가 장흥 보림사를 거쳐 강진에 도착했을 때, 강진 현감 이유문은 때마침 보고차 나주로 가서 며칠이 지나야 온다는 기별이었다. 그를 보러 온 걸음이었으므로, 부자는 인근을 유람하며 이유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만덕사와 백련동, 대둔사, 미황사 등 근처의 명승을 두루 유람했다.

강진으로 돌아오기 전날 정재원과 정약전 부자는 목리(牧里)에 살던 윤광택(尹光宅)의 집을 찾아, 그곳에서 하루 밤을 묵었다. 그는 처가 쪽으로 먼 일가였다. 윤광택은 당시 소를 잡아 정재원을 크게 환대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정재원이 이 집에 머물며 쓴 ‘숙윤생광택가(宿尹生光宅家)’란 시 한 수가 정재원의 문집 ‘하석유고(荷石遺稿)’에 실려 있다.

이후 윤광택의 아들 윤서유(尹書有)가 1790년 서울로 유학하면서 이가환을 찾아 뵈었고, 당시 다산 형제와도 가깝게 교분을 나누었다. 1801년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 왔지만, 그 직전 윤서유는 이가환, 정약용 등과 좋게 지냈다는 이유로 죄망(罪網)에 걸려, 강진현감 이안묵에게 붙들려 가서 옥에 갇혔다. 하지만 이가환이나 천주교와 연관된 이렇다 할 증거가 없어 얼마 안 가석방된 터였다. 이후 다산이 강진에 유배 와서 주막집 봉놋방에 묵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현감의 서슬이 무서워 서로 아는 체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1802년 10월에 윤광택은 윤서유의 사촌인 윤시유(尹詩有)에게 술과 고기를 들려 몰래 다산에게 보내 만나보게 했다. “친구의 아들이 곤궁하게 되어 우리 고을에 의탁했는데, 내가 비록 거처를 마련하고 양식을 댈 수는 없다 해도 단지 두려워 삼간다는 핑계로 마침내 안부조차 묻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산이 10월에 황상을 내제자로 들이고, 이 시점에 윤광택이 윤시유를 다산에게 보냈던 것을 보면, 1802년 10월을 기점으로 해서 다산에 대한 감시가 한결 누그러지게 된 어떤 계기가 있었던 듯하다.

이렇게 해서 두 집안의 인연이 다시 맞닿았다. 이후로도 이따금씩 밤중에 몰래 찾아와서 정분을 이었다. 이는 다시 윤서유의 아들 창모(昌模)가 이후 초당 시절 다산의 제자로 들어왔다가 1812년에 다산의 사위가 되는 인연으로 발전했다.

'조선수경' 제2책 마지막 면 여백에 이정이 자신의 이름을 다른 글자로 개명했다고 메모한 기록. 정민 교수 제공
 ◇서당 생도들의 면모 

1802년 10월 이후, 새롭게 시작한 사의재 서당에서 다산은 아동 학습교재와 교과과정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제껏 생각해 본 적 없던 어린이 교육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학생들은 대부분 강진 지역 아전의 자식들이었다.

당시 다산의 사의재 서당에서 함께 공부한 사람으로는 손병조(孫秉藻), 황상, 황경, 황지초, 이정(李정(田+靑)), 김재정(金載靖) 등 6인의 이름이 남아있다. 이들의 이름은 다산이 훗날 강진을 떠날 때 초당 시절 제자들과 맺은 다신계(茶信契)의 절목 속에 읍성 제생의 명단을 따로 첨부함으로써 남았다. 다산이 1808년 귤동 초당에 들어온 뒤 해남 윤씨 집안 자제들로 중심이 된 새로운 공부 그룹이 만들어지자, 신분에 차이가 있던 이들은 이곳 서당에 합류하지 못했던 듯하다.

여섯 중에서는 손병조가 가장 연장이었고, 황상과 황경, 황지초는 형제 또는 사촌간이었다. 이정은 그간 이청으로 불려왔는데, 그가 친필로 정리한 ‘조선수경(朝鮮水經)’ 제 2책의 뒷면여백에 자신이 이름을 ‘정’에서 ‘정(日+政)’으로 개명했다는 메모가 남아있다. 정(日+政)의 음이 정이므로 이청이 아니라 이정으로 읽는 것이 옳다. 메모는 1825년 10월 30일에 썼다.

다산은 이들 읍성 제자들에 대해 ‘다신계절목’에서 이렇게 썼다. “처음 왔을 때는 백성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문을 부수고 담을 무너뜨리며 편히 지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를 당하여 좌우가 되어 준 사람은 손병조와 황상 등 네 사람이다. 이로 말미암아 말한다면 읍성의 여러 사람은 근심과 환난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다.” 글로 보아 이정과 김재정의 합류는 앞의 네 사람보다 조금 차이가 있었던 듯하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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