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아침을 열며] ‘왈칵 모멘트’라는 성장의 순간

입력
2019.07.24 04:40
27면
0 0
나이가 아주 많은 축에 속했던 나는 무릎관절이 아파 2박 3일 행군 내내 고통스러웠다. 겨우겨우 훈련을 마쳐갈 즈음, 땀에 찌든 상태에서 수분까지 부족하니 다리에 힘이 빠지고 몹시 어지러운 증세가 나타났다. 한 발짝 더 내디딜 수 없었다. 그러자 동료 후보생들은 목숨과도 같은 수통의 물을 나눠 주었다. 나는 그러한 전우애 덕분에 겨우 훈련소에 복귀할 수 있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나이가 아주 많은 축에 속했던 나는 무릎관절이 아파 2박 3일 행군 내내 고통스러웠다. 겨우겨우 훈련을 마쳐갈 즈음, 땀에 찌든 상태에서 수분까지 부족하니 다리에 힘이 빠지고 몹시 어지러운 증세가 나타났다. 한 발짝 더 내디딜 수 없었다. 그러자 동료 후보생들은 목숨과도 같은 수통의 물을 나눠 주었다. 나는 그러한 전우애 덕분에 겨우 훈련소에 복귀할 수 있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미권에서 ‘아하 모멘트(Aha moment)’라는 표현이 종종 사용된다. ‘유레카 효과(Eureka effect)’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뭔가 기발한 착상이나 발견을 떠올려 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찾아낸 순간을 묘사할 때 사용한다. 필자도 연구자로서 풀리지 않는 문제의 돌파구를 찾는 ‘아하 모멘트’를 드물게 경험하곤 한다.

하지만, 교육자로서 학생들과 함께 느끼는 성장의 순간이 조금 더 기쁜 것 같다. 그걸 필자는 ‘왈칵 모멘트’라고 부른다. ‘왈칵 모멘트’는 뭔가 한계에 부딪혀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포기까지 고려하던 그 순간, 포기하지 않고 힘을 내 도전했을 때 결과에 상관없이 느껴지는 희열과 고통이 복합된 순간이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그 순간, 갑자기 고통은 사라지고 도전 자체가 주는 성장에 감사하게 된다.

필자가 처음 ‘왈칵 모멘트’를 경험한 것은 군에서 장교 복무를 위해 훈련을 받고 있을 때였다. 학사사관후보생(장교후보생) 중 나이가 아주 많은 축에 속했던 나는, 무릎관절이 아파 훈련기간 내내 고통스러웠다. 겨우겨우 훈련을 마쳐갈 즈음, 땀에 찌든 상태에서 수분까지 부족하니 다리에 힘이 빠지고 몹시 어지러운 증세가 나타났다. 한 발짝 더 내딛는 게 고통이었다. 그러자 동료 후보생들은 목숨과도 같은 수통의 물을 나눠 주었다. 그러한 전우애 덕분에 겨우 훈련소에 복귀했을 때, 나는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평소에는 잘 눈에 띄지도 않던 훈련소 내 돌탑에 적힌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조국은 그대를 믿는다.”

아, 난 무너졌다. 이 허접하고 부실한 나를 믿어주다니. 2박 3일의 행군조차 겨우 버텨내는 이 허접한 나를 믿어주는 분들이 생각났다. 젊은 혈기에 얄팍한 지식으로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호기를 부렸던 바깥사회에서의 교만이 내 등짝을 때리는 듯했다. 아직 너무 부족한 나를 부모와, 선생님과, 전우들이 여전히 믿어주고 있다니. 혼자 이를 악물며 더 나은 내가 되어 이 빚을 갚겠다는 다짐의 독백을 하던 그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성찰과 평화의 순간이다.

거의 20년이 지난 요즘 느끼는 ‘왈칵 모멘트’는 조금 다르다. 필자가 소속된 대학원에서는 대부분의 수업이 영어로 이뤄지며, 학생들은 과제물에서 학위논문까지 모두 영어로 작성하고, 수업시간 발표도 원칙적으로 영어로 수행한다. 100% 영어가 사용되는 국제학회에서 우리의 피와 땀으로 작성한 논문을 자신 있게 발표하고, 세계적 학자들과의 논쟁에서 거리낌없이 의견을 피력할 수단을 갈고 닦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영어 지상주의 차원은 전혀 아니다. 학생들은 영어 발표 연습에 불평을 하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자신의 소통 능력 부족이 부끄러워 불필요하게 더 경직되기도 한다. 하지만, 교수로서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한 학생에게 만약 현재 영어실력으로 글로벌 무대에 나갔을 때 공들인 연구 결과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를 권한다. 이미 스스로에게 충분히 부끄러움을 느꼈던 그 학생의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는 나도 눈물을 참아내야 한다. 그리고는 적절한 영어 단어를 알려주며, 한 번 더 해보자고 얘기한다. 미리 준비해서 조금 더 편하게 글로벌 무대로 진출했으면 하는 내 마음을 이 학생이 알아줄까. 눈물의 순간이, 정적이, 야속함이 이 학생을 성장시킨다. 이러한 ‘왈칵 모멘트’를 견뎌낸 학생들은 1년 뒤, 2년 뒤 국제학회 무대에 데뷔할 때 이렇게 얘기한다. “교수님, 막상 나와서 발표하고 토론해 보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를 포기하지 않아주셔서 감사합니다.” 20년 전 내가 그랬듯이, 오늘도 나는 학생들과 함께 눈물을 흘린다. 이 눈물이, ‘왈칵 모멘트’가, 우리를 성장시킨다.

김장현 성균관대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