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2013년 문을 연 빙수전문점 부암동 빙수의 밀크티 빙수. 부암동 빙수는 빙수의 모든 소스를 직접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홍인기 기자

‘생계형 마르크스주의자’ 임승수 작가가 지난해 출간한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에는 2014년 여름 다섯 살 첫째와 돌 갓 지난 둘째를 데리고 아내와 함께 ‘그렇게 맛있다’고 소문 난 애플망고빙수를 파는 남산의 서울신라호텔을 다녀온 ‘웃픈’ 체험담이 실렸다.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가격을 찾아 봤더니 4,200원. 너무 싸다 싶어 다시 보니, 역시나 ‘0’을 하나 빠트렸다. 빙수 한 그릇이 무려 4만2,000원(현재 5만4,000원)이라니. 올 여름 빙수 이거 하나로 퉁 친다는 마음으로 향했지만 호텔 앞은 발레파킹 하는데 2만원이란 충격적인 소리를 들었다. 방문자가 직접 주차하려면 차를 끌고 한참을 내려갔다 다시 걸어 올라와야 했다. “저희 빙수만 먹고 갈 건데요.” 어린 아이들을 걱정해준 직원 덕분에 발렛파킹 구역에 무료로 주차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입성한 신라호텔 1층 더라이브러리 라운지카페. “빙수 ‘하나’ 주시고, 숟가락 ‘네 개’ 부탁드려요.” 드디어 등장한 애플망고빙수의 맛은 소문대로였다. 대패처럼 얇게 썰린 연유 얼음은 순차적으로 녹아 내렸다. 커다란 깍두기처럼 큼직큼직 썰려 있는 제주산 애플망고는 과연 씹히는 것인지 이빨에 닿아 녹는 것인지 알기 힘들 정도로 부드러웠다. 임 작가는 그날의 경험을 두고 “4만2,000원으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였다”고 적었다.

호텔빙수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애플망고빙수는 높은 가격(5만4,000원)에도 불구하고 하루 평균 평일 기준 150~200개, 주말에는 250개 이상 팔릴 정도로 인기가 여전하다. 서울신라호텔 제공

한여름 대한민국은 빙수 공화국이다. 프랜차이즈뿐 아니라 빙수만 전문으로 파는 작은 가게들이 속속 생겨났고, 호텔들은 매년 여름 자존심을 걸고 새로운 메뉴를 선보이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나 패스트푸드점도 빙수 전쟁에 가세한 지 오래다. 최근에는 가성비를 앞세운 편의점들이 자체 상품을 내놓으며 신흥 강자로 떠올랐다. 소비층도 다양해졌다. 2030 젊은 직장인들은 밥 먹고 입가심으로 ‘아아(아이스아메리카노)’ 대신 빙수를 찾고 있고, 해장용으로 빙수가 특효약이라는 얘기까지 퍼지며 중장년층 남성들의 입맛까지 붙잡았다. 왜 사람들은 빙수에 열광하는 걸까. 대한민국 디저트 문화 판도까지 바꿔놓은 빙수의 역사를 들여다봤다.

 ◇왕의 간식에서 길거리 불량식품으로 

한국 빙수의 기원은 뚜렷하지 않다. 중국과 일본에선 11세기부터 얼음을 갈아 즙을 넣어 먹었다는 기록이 전해지지만, 우리나라 문헌에선 특별히 찾아볼 수 없다. 얼음은 본디 귀한 재료였다. 왕실과 상류층만 얼음을 향유할 수 있었다. 일반 백성은 여름에 쓸 얼음을 캐느라 겨울 내내 한강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조선시대 여름에 쓰는 얼음을 백성의 눈물이 얼어붙은 것이라는 뜻으로 누빙(淚氷)이라고도 부른 이유다. 조선시대엔 양반들이 얼음쟁반(氷盤)에 과일을 담아 시원하게 만들어 떠먹었다는 내용 정도만 나온다. 지금의 화채다. 윤덕노 음식평론가는 “역사적으로 얼음이 귀했던 탓도 있었겠지만, 한국은 유독 얼음 덩어리째 먹는 음식문화를 선호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한반도에 빙수가 널리 퍼지기 시작한 건 1913년 경성에 제빙 회사가 생겨나면서다. 1921년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경성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빙수집이 187곳, 조선인이 운영하는 빙수집이 230곳으로 도합 417곳’에 달했다. 그러나 빙수의 대중화는 부작용도 낳았다. 식용 얼음이 아닌 생선 보관용 얼음 등을 마구잡이로 사용한 게 문제였다. 먹거리 안전에 대한 의식이 희미했던 시절, 빙수는 길거리에서 파는 불량식품 취급을 받았다.

 ◇얼음 위 무궁무진한 토핑의 세계 
‘나이프로 썰어 먹는 빙수’로 입소문을 탄 이태원의 실타래 빙수(왼쪽 위 사진), 설빙에서 만든 티라미수(오른쪽 위 사진), 마카롱 빙수(왼쪽 아래 사진)는 디저트와 빙수를 결합시켰다. 멜론을 통째로 쓴 빙수도 인기다. 카페 티라벤토ㆍ설빙 제공

빙수가 디저트 시장 목록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올린 것은 2010년대부터다. 2011년 서울신라호텔이 애플망고 빙수를 선보이며 호텔 빙수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2013년엔 사계절 빙수 전문 카페를 표방한 설빙을 시작으로 빙수 전문점이 앞다퉈 문을 열면서 빙수 시장의 판이 커졌다. 업체마다 조금이라도 새로운 메뉴를 내놓으려고 경쟁하면서 빙수는 해가 갈수록 진화하는 흐름이다. 포슬포슬한 얼음 위에 단팥과 떡, 젤리를 올려 내놓던 팥빙수는 이제 고전이 됐다. 물이 아니라 우유를 얼음 베이스로 갈아 만든 눈꽃빙수가 대세를 형성했다.

우리나라 빙수는 막강한 응용력을 자랑한다. ‘올릴 수 있는 건 다 올려본다’고 할 만큼 토핑은 무궁무진하다. 그러다 보니 얼음 위에 재료를 푸짐하게 올리는 것은 미덕이 됐다. 제철 과일만 해도 망고, 딸기, 무화과, 코코넛, 감귤, 복숭아, 살구 등 다양한 생과일이 토핑으로 얹어진다. 멜론과 수박, 파인애플이 통째로 나오는 빙수도 있다.

각종 디저트와 결합하기도 한다. 한국의 대표 간식이었던 콩고물과 쫄깃한 인절미를 올린 설빙의 인절미 빙수는 시그니처 메뉴로 올라섰다. 최근에는 얼음 위에 마카롱을 잔뜩 쌓아놓거나, 치즈케이크와 티라미수, 브라우니 등도 함께 선보인다. 와인과 샴페인, 코냑을 곁들인 빙수는 주류를 빙수와 접목시킨 사례다.

 ◇연중 빙수, 그 해 디저트 트렌드 ‘축약판’ 

빙수 종류의 다양화는 ‘여름 빙수’라는 공식도 깨고 있다. 빙수 전문점들이 계절의 특성을 반영한 시즌 메뉴를 선보이면서다. 2013년에 문을 연 부암동 빙수가 사계절에 맞춰 내놓은 빙수 종류는 40여가지에 달한다. 봄에는 쑥, 가을엔 고구마와 단호박, 겨울에는 밤으로 차별화하고 있다. 김소연 부암동 빙수 대표는 “손님들이 ‘이런 빙수를 만들어 달라’고 먼저 요청해 오는 경우도 있다”고 귀띔했다. 설빙의 경우 지금까지 개발된 메뉴가 130개에 달한다.

2016년 이태원에 문을 연 티라벤토에서 파는 실타래 빙수는 ‘나이프로 썰어 먹는 빙수’로 알려지며 빙수 마니아들의 성지로 떠오른 곳이다. 우유와 파우더를 섞어 실처럼 뽑아내 차곡차곡 쌓아 올려 밀도를 높였는데 너무 차갑지 않아 오히려 겨울에도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해림 푸드칼럼니스트는 “신라호텔에서 애플망고빙수를 시작한 배경도 망고가 디저트로 뜨면서였다”며 “빙수는 그해 푸드와 디저트의 첨단 트렌드가 100% 반영되는 축약판”이라고 설명했다. 예컨대 올해 음료업계에서 흑당 시럽과 쫀득한 식감의 타피오카 펄이 조화를 이룬 ‘블랙슈가’가 뜨고 있는 것을 반영해 흑당 빙수와 타피오카 펄을 넣은 빙수가 등장하는 식이다. 이 때문에 “한국 디저트의 역사를 훑고 싶으면 빙수 트렌드를 살펴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맛보다 이미지, 작은 사치를 먹는다 
요즘 빙수는 평범함을 거부한다. 초콜릿 돔을 망치로 깬 후 솔티드 캐러멜을 곁들여 먹는 ‘갤럭시 빙수’(왼쪽), 부드러운 머랭과 아이스크림, 초콜릿 시럽과 코냑이 더해져 풍미 깊은 맛을 내는 ‘봄브 알라래카 빙수’. JW 메리어트 동대문 스퀘어 서울 호텔 제공

그러나 우리나라 빙수가 최상의 맛을 고려하기보다는 이미지로 시선을 잡는데 만 골몰하고 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이용재 음식평론가는 “치즈케이크 같은 경우 얼음과 온도 차이로 인해 토핑으로 올라간 재료가 딱딱해져 본연의 맛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며 “시각 측면에서는 보기 좋을지 몰라도 미각 측면에서 겉돌 수밖에 없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빙수 가격이 점점 높아지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그럼에도 빙수 먹는 행위를 하나의 여가 문화로 소비하려는 흐름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젊은층에선 이색 빙수 전문점이나 호텔 빙수를 비교해 먹는 ‘빙수 투어’에 나서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지난 18일 저녁 부암동 빙수 가게에서 만난 직장인 윤소희(32ㆍ서울 신길동)씨는 주문한 빙수가 나오자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윤씨는 “커피나 차를 마시는 것보다 일단 시각적 즐거움을 주고 또 친구들과 나눠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퇴근 후 즐길 수 있는 여가 생활의 디저트로 빙수만 한 게 없다”고 말했다. 빙수 맛집을 찾아 다닌다는 직장인 양슬기(36ㆍ서울 명일동)씨는 “당장 휴가를 떠나지 못하는 일상에서 그나마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작은 사치다”라고 말했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홍윤지 인턴기자

공감은 비로그인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