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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관련자 불러 설득 압박 옛말... 데이터로 증거 딱 집어낸다

입력
2019.07.22 04:40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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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특별수사의 숨은 칼, 포렌식

대검찰청 국가디지털포렌식센터의 상황판 모습. 2008년 설립돼 검찰 과학수사의 중추 역할을 하는 이 곳은 조희팔 다단계 사기 사건, 가상화폐 사기 일당 수사 등 첨단 수사기법이 필요한 사건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고영권 기자
대검찰청 국가디지털포렌식센터의 상황판 모습. 2008년 설립돼 검찰 과학수사의 중추 역할을 하는 이 곳은 조희팔 다단계 사기 사건, 가상화폐 사기 일당 수사 등 첨단 수사기법이 필요한 사건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고영권 기자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국가디지털포렌식센터(NDFC) 내 상황실. iDEAS(아이디어스ㆍ통합디지털증거분석시스템)을 켜자 △모바일 △계좌내역 △이메일 △회계 등 몇 가지 항목이 화면에 떴다. 특정 사건의 계좌내역을 검색하자 계좌상 드러난 사건 관계인의 자금 흐름이 나타났다. 단순히 이러하게 흘러갔다는 정도가 아니라 시계열 순으로 그래프화되어 표시됐다.

패턴은 일정했다. 서너달 동안 돈이 쭉 들어오다 일정 시기가 지나면 일거에 빠져나가고 다시 돈이 모이기 시작했다. ‘계단식 흐름’이다. 아이디어스를 개발한 이인수 대검 과학수사부 디지털수사과 디지털포렌식 연구소장은 "이게 전형적인 대포통장의 흐름”이라며 “잔액이 떨어진 시점에 돈이 누구에게 갔는지 보면 대포통장을 어떤 범죄에 썼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모바일’ 영역에서 아이디어스는 더 신기한 힘을 발휘했다. 공범 이름을 넣자마자 그가 움직인 동선이 전국적 규모로, 그것도 관련 인물들과의 친밀도에 따라 일목요연하게 그려졌다. 미드(미국 범죄 드라마)에서 나오는 장면 같다. 이 정보는 디넷(D-NET)이라 불리는 수사지원 인프라를 통해 일선 검사와 수사관들에게 전달된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검사는 "포렌식센터 자료는 엑셀 파일 단순 정리 수준을 넘어서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된다”며 "사람, 돈 등 복잡하게 얽힌 사건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 세계 어디 내놔도 손색없다"고 말했다.

디지털 포렌식팀 현황. 그래픽=박구원 기자
디지털 포렌식팀 현황. 그래픽=박구원 기자

 ◇회계분석팀이 ‘구도’를, 포렌식팀이 ‘증거’를 

과학 수사는 한 단계 더 진화했다. 관련자들을 차례로 불러다 설득하고 압박하던, ‘수사’라면 흔히 떠올리던 장면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제는 회계분석팀이 구도를 잡고, 포렌식팀이 증거로 옭아맨다.

검찰의 자체 사건이던, 고소ㆍ고발된 사건이던 사건이 일단 배당되면, 이제 제일 먼저 달라붙는 이들은 회계분석팀이다. 대검 회계분석팀의 경우, 회계분석 교육을 수료한 전문수사관만 114명에 이른다. 공인회계사, 증권ㆍ외환ㆍ국제금융 전문가 등도 14명 보유하고 있다. 금융감독원 같은 다른 기관에 기대지 않아도 자체 분석 역량이 충분하다.

단적인 게 2016년 대우조선해양 분식회계 사건이었다. 당시 대우조선해양의 분식회계 규모는 단일기업 사상 최대 규모인 5조원대였다. 대검 회계분석팀은 이 분식회계의 자금흐름을 추적해냈을 뿐 아니라, 회계법인이 진행하는 외부감사의 문제점까지 밝혀내 ‘주식회사 외부감사법’ 개정 작업까지 이끌어냈다. 특수부의 한 검사는 "회계분석팀의 초벌 분석 자료에 따라 수사 진행 속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검사들은 자기 사건을 먼저 분석해달라고 경쟁까지 한다”고 말했다.

회계분석팀이 사건의 전체 구도를 잡으면, 구체적 증거를 딱 집어내는 포렌식팀의 활약이 시작된다. 대검 중수부는 2011년 저축은행 비리 수사 때 기습적인 압수수색을 단행했다. 은행 직원들은 서버 전원을 차단하고 회계자료를 숨기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포렌식 요원들은 압수수색 당시 폐쇄회로(CC)TV 영상을 분석, 직원들이 이리저리 숨긴 자료들을 다 찾아냈다. 이 자료들은 저축은행들을 기소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포렌식 수사는 지구력 싸움이기도 하다. 지금 한창 재판이 진행 중인 사법농단 사건의 경우 포렌식 요원들이 8개월 동안 아예 법원전산센터로 출근했다. 임의제출될 자료를 찾아낸 뒤 판사들로부터 검사를 받는 방식으로 증거를 모았다. 한 수사관은 "정해진 시간 안에, 방대한 자료를 품고 있는 서버 분석을 하려니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작업이었는데, 포기하지 않고 진행한 결과 객관적 물증을 촘촘히 모아 기소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대검 회계분석팀ㆍ디지털 포렌식 수사 연혁. 그래픽=박구원 기자
대검 회계분석팀ㆍ디지털 포렌식 수사 연혁. 그래픽=박구원 기자

 ◇문무일 검찰총장의 숨은 공 

이런 수사 방식이 정착된 건 문무일 검찰총장의 노력 덕이다. 문 총장은 2004년 대검 중수부 특별수사지원과장으로 일할 때 회계분석과 포렌식의 중요성을 소리 높여 외쳤다. 공인회계사 출신 수사관 2명을 특별채용하고, 기업회계분석팀을 만들었고, 포렌식 센터 건립을 위한 예산까지 따냈다. 중수부 출신 한 검사는 "그 당시에는 중수부 내에서도 ‘문 과장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란 반응이 많았다”며 "2005년 수자원공사 수사 때 회계분석팀, 포렌식팀이 결정적 증거를 찾아낸 뒤 그런 말들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지난해 포렌식팀이 지원한 수사 건수는 1만2,333건에 이른다. 회계분석팀은 최근 5년 동안 65건 이상의 수사를 지원했다. 커지는 중요성에 비해 지원은 부족하고, 디지털 증거법 법제화도 걸음마 단계다. 대검 관계자는 "포렌식 기법을 쓰려면 컴퓨터 등 고성능 장비가 뒷받침돼야 한다”며 “수사는 점점 디지털화되는데, 예산 등 뒷받침은 부족해 걱정이 크다”고 말했다. 대형 로펌들도 포렌식 팀을 꾸리는 등 대응책을 강구하고 있다. 법무부 관계자는 “이런 상황에서 법원은 여전히 '전문가가 검증 가능한 도구로 표준 절차에 따라서 수행하라'는 애매한 판례 하나로만 디지털 증거능력 여부를 판단하고 있다"며 "디지털 증거능력에 대한 법제화가 빨리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정재호 기자 next8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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