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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아이 업고 미친년처럼 뛰며 촬영” 여성 감독 첫 발 뗀 박남옥

입력
2019.07.20 04:40
수정
2019.07.21 11:29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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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시대와 불화한 선구자 박남옥 감독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 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들을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한복을 입은 박남옥 감독이 어린 딸을 업고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박 감독은 출산의 와중에 영화 '미망인'을 완성했다.
한복을 입은 박남옥 감독이 어린 딸을 업고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박 감독은 출산의 와중에 영화 '미망인'을 완성했다.

한복 차림에 고무신, 파마머리를 한 채 갓난아이를 업은 여성의 눈이 카메라의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박남옥(1923~2017) 감독의 사진이다. 단 한 편이지만 ‘미망인’(1955)을 연출해 한국 최초의 여성 감독으로 기록된 사진 속 그녀의 표정에서는 결연한 의지와 동시에 피로감이 읽힌다. 1923년 경북 대구의 하양에서 태어난 박남옥은 어릴 적부터 여러 방면에 다재다능함을 보여주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1939~41년 육상선수권 대회 투포환 종목에 출전해 3회 연속 조선 신기록을 기록한 육상선수이면서, 문학과 미술에 관심을 가진 지성인이었고, 신문에 영화 관련 글을 다수 기고한 평론가이기도 했다.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난 여성의 사회진출을 일탈로 규정하던 시대상, 배우 말고는 여성이 설 자리가 없다시피 했던 한국 영화계에 박남옥은 너무 일찍 도착한 ‘신여성’이었다.

◇육상선수와 화가를 꿈꿨던 소녀

육상선수의 길을 걷고자 했지만 부모의 반대로 좌절한 박남옥은 1939년엔 미술을 전공하고자 우에노 미술학교에 진학하려고 한다. 학교로부터 추천장을 받지 못해 몰래 보낸 입학서류가 학교측으로 반송되는 바람에 유학을 포기해야 했다. 1943년 선망하는 이화여전 가사과에 진학했지만 박남옥은 학업에 별 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틈틈이 몰래 방을 빠져 나와 헌 책방을 전전하며 독서로 소일하거나, 극장을 드나들며 꾸준히 영화를 보고 노트에 비평을 쓰는 걸 삶의 낙으로 삼았다. 영화잡지 신영화를 탐독하던 박남옥은 인터뷰 기사를 읽은 걸 계기로 여배우 김신재의 팬이 되었다. 그가 출연한 작품의 스틸사진을 모아 스크랩북을 만들고, 수십 통의 팬 레터를 써 보내기도 했는데, 이는 훗날 박 감독이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1946)에 스태프로 참여하는 인연으로 이어진다.

이 무렵 박남옥을 매혹시킨 영화들은 레온티에 사강의 ‘제복의 처녀’(1933), 줄리앙 뒤비비에의 ‘무도회의 수첩’(1937)이나 레오니드 모귀의 ‘창살없는 감옥’(1938)과 같은 외화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감명을 준 건 독일의 여성감독 레니 리펜슈탈(1902~2003)이 연출한 베를린 올림픽 다큐멘터리 ‘올림피아 1부 – 민족의 제전’(1938)이었다. 장대한 스케일의 대작을 여성 감독의 힘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자신도 영화감독이 되어야겠다고 자극을 받았던 것이다. 1944년 가을 대구일일신문에 문화부 기자로 입사한 그는 독일 무성영화의 스타 에밀 야닝스 주연의 영화 ‘지배자’(1937)를 보고 평을 썼는데, 편집차장이 이 글을 눈여겨 보고 문재(文才)를 인정해 한동안 영화평을 담당하게 된다.

해방 이후 신문사가 문을 닫자 도로 상경한 박남옥은 광희동 촬영소에서 일하게 되면서 영화계에 발을 들인다. 이 시기 그녀는 이규환 감독의 ‘똘똘이의 모험’(1946), ‘민족의 새벽’(1947) 등에 편집조수로 일하며 영화 현장의 실무를 배워나갔다.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서’(1947ㆍ배우 최은희의 데뷔작이다)부터는 스크립터로서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 때 기막힌 일을 겪게 된다. 제작진이 박남옥만 데려가지 않고 포항 로케이션 촬영을 따로 진행한 것이다. 여성과 동석해 이동하거나 같이 일하는 걸 꺼려하는 풍속 탓이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박남옥은 (전후 ‘자유부인’(1956)을 연출하는) 한형모 감독을 따라 국방부 촬영대에 합류하여 전시 뉴스릴을 작업하게 된다. 서울이 수복되면서 국방부 촬영대도 육군과 함께 올라가게 되었는데, 이때도 여성의 동승을 금지한다는 규정을 빌미로 탑승을 거부당한 박남옥은 촬영대 대장의 허락을 얻고 군복차림을 한 뒤에야 트럭에 합승하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박남옥 감독의 데뷔작이자 마지막 작품이 된 '미망인'(1955). 한국 영화 최초 여성 감독 작품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남옥 감독의 데뷔작이자 마지막 작품이 된 '미망인'(1955). 한국 영화 최초 여성 감독 작품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감독 작가에 밥차까지

1954년 5월, 30세의 박남옥은 방송극작가 조남사의 소개로 알게 된 극작가 이보라와 부산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딸 이경주를 순산한지 3일 만에 몸을 추스른 박남옥은 국립극장의 ‘아리랑’ 공연을 보러 간 뒤 지인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전쟁미망인을 소재로 한 영화상을 밝혔다. 전쟁 직후의 한국사회는 남편을 잃고 생활이 곤궁해진 여성들이 대거 직업 전선으로 뛰어들게 되면서 경제적 주체가 되는 한편, 근대적 자유연애의 풍조가 전통적인 가족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이런 시기에 박남옥은 남편과 사별한 여성들이 처한 현실의 문제와 당대 여성들의 내밀한 심리를 조명하는, 네오리얼리즘과 멜로드라마가 결합된 형태의 ‘여성 영화’를 만든다는 발상을 한 것이다. 한국 영화사 최초의 여성 감독이 연출한 ‘미망인’(원제 ‘과부의 눈물’)의 탄생이었다.

평소 친분이 있던 배우 이민자를 주연으로 기용하고, 남편 이보라와 함께 집필한 시나리오를 손에 쥔 박남옥은 제작비를 융통하러 사방을 뛰어다녔다. 그러나 여성 감독에게 선선히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투자자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둘째 언니로부터 자금을 빌려서야 초기 제작비를 충당할 수 있었고, 영화사의 이름은 자매영화사가 되었다. ‘미망인’은 1954년 6월 크랭크인했다. 그러나 16㎜필름으로 찍는 영세한 저예산 영화인데다, 여성이 메가폰을 쥔 영화에 스태프는 열의를 갖지 않았고 감독이 일일이 나서서 빈 자리를 메워야 했다. 일정을 펑크 낸 배우와 스태프를 찾아 다방을 뒤지고, 산속의 집까지 일일이 찾아가는가 하면, 지방에 빌려준 카메라가 반납되지 않아 그걸 찾으러 예닐곱 시간을 밤 열차를 타고 가며 뜬 눈으로 보내곤 했다. 구경꾼들을 내보내고 현장을 정리하는 일부터 15~20명의 스태프에게 먹일 밥을 마련하는 밥차 아줌마의 역할까지 박남옥 혼자 해내야 했다.

“영화 제작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예술을 논했지만, 막상 영화 제작에 들어가니 아이를 업고 기저귀 가방을 들고 반년을 미친 년처럼 이리 저리 뛰며 보냈다.”

박남옥(가운데) 감독이 한 영화 촬영장을 찾아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였던 엄앵란씨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남옥(가운데) 감독이 한 영화 촬영장을 찾아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였던 엄앵란씨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호평 불구 3일만에 끝난 상영

친정이 대구에 있어 아이를 맡길 수 없었던 박남옥은 제작기간 내내 딸을 업고 다니면서 일해야 했다. 감독과 어머니의 역할을 한 몸에 짊어져야 했던 그녀의 상황은 공교롭게도 전통적 가족주의와 근대적 여성상 사이에서 번민하는 인물을 다룬 ‘미망인’의 주제와도 겹치는 것이었다. 폐렴에 걸린 딸을 등에 업은 채 추위 속에서 일주일 만에 편집을 마친 박남옥은 녹음을 위해 1955년 1월 6일 중앙청 공보처의 녹음실을 찾아갔다. 이때 돌아온 답변은 “연초에 16㎜ 작품에다 여자 작품은 녹음할 수 없다”는 모욕적인 답변이었다. 전창근, 홍은원, 라애심 등 동료 영화인들의 도움으로 녹음실을 구해 간신히 작업을 마쳤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녹음실 계단을 수백 번 오르내리느라 치마 자락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고 한다.

‘미망인’은 1955년 12월 10일 중앙극장에서 개봉했다. ‘여성감독이 아니면 착안하기 어려운 앵글의 각도와 사건의 템포, 리듬의 명쾌, 화면과 동작(연기) 등에 생활감정을 예리하게 융화하여 퍽 친근감을 자아냈다.’(동아일보ㆍ1955년 2월 27일자)는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보수적인 사회 인식의 벽은 너무 높았고 영화는 겨우 3일 만에 극장에서 내려가고 말았다. 결혼과 출산, 영화 제작과 흥행 실패, 결혼 생활의 파경을 잇달아 겪고 탈진한 박남옥은 한동안 휴식기를 갖다 월간 영화잡지 씨네마팬을 창간해 편집장을 지냈고, 1960년 도쿄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아영화제에 참석했다. 이때 일본의 명배우 미후네 도시로가 담배에 불을 붙여주는 장면이 사진으로 남아 화제가 되었다. 그 뒤 동아출판사의 관리과장으로 23년을 근속한 박남옥은 1980년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떠나 그곳에서 만년을 보낸다.

단 한 편에 그쳤지만 박남옥의 등장은 ‘여판사’(1962)의 홍은원, ‘첫 경험’(1970)의 황혜미와 ‘수렁에서 건진 내 딸’(1984)의 이미례를 거쳐 임순례, 변영주, 정재은 등 여성 감독들이 활약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1997년 ‘미망인’의 필름 프린트가 발굴되어 제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상영되었고, 임순례의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 - 여성 영화인이 말하는 영화'(2001)을 통해 잊혀져 있던 여성감독 박남옥의 존재는 재조명을 받았다. 2017년 4월 8일, 박남옥 감독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4세. 시대와의 불화 속에서 꿋꿋이 여성영화인의 길을 개척한 선구자의 생애였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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