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18일(현지시간)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 교외에서 애국가가 흘러 나왔다. 이곳 자택에서 만난 허 게오르기(75)씨는 먼 조국에서 온 취재진에게 네 문단의 러시아어가 적힌 A4용지를 보여준 후 떨리는 손을 붙잡고 애국가 1~4절을 내리 불렀다. 종이엔 자신이 직접 번역한 러시아어 버전의 애국가가 빼곡히 써 있었다.
허씨의 선친은 고(故) 허국. 1970년대 사망한 허국은 최고 건국훈장인 대한민국장을 한국인 중 이승만 대통령, 이시영 부통령에 이어 세번째로 수여받은 왕산(旺山) 허위 선생의 4남이다. 왕산은 구한말 의병장으로서 항일운동을 주도하다 경성감옥(현 서대문형무소)의 제1호 사형수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후손들은 조선에서 만주로, 만주에서 연해주로 도피했고 이중 허국의 가족들은 다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을 거쳐 1960년대부터 키르기스스탄에 터를 잡았다.
허씨는 “부모님이 매년 이 마을 저 마을 옮겨 농사지으며 워낙 힘들게 살아서 할아버지(허위) 얘기는 많이 듣지 못했다”며 “그나마 기억하는 건 아버지(허국)가 어릴 때 몰래 담배를 피시다 할아버지 오시니까 급하게 숨기려다가 팔에 데여 흉터가 남았다는 정도”라고 말했다. 평소 시 짓기로 글솜씨가 뛰어났던 허국은 1940년대 카자흐스탄에서 스탈린에게 고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 답신도 받았는데, 이후 정부기관의 감시가 이어져 도리어 우즈벡으로 도주하는 계기가 됐다.
이국에서 악착같이 생활해 온 허씨는 2006년 동생 허 블라디슬라브(68)씨와 함께 주변의 도움으로 한국 국적 취득에 성공했다. 당시 왕산가(家) 후손들의 귀화 소식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부 지원 정착금이 나왔지만 석계역 인근의 반지하 집을 전세로 겨우 구할 정도였고, 한국어 구사가 완전하지 못하다 보니 일자리도 구하기 힘들었다. 허 게오르기씨는 “교육을 최우선으로 여기던 아버지 말씀에 따라 두 형제 모두 대학까지 마쳤지만 한국에 돌아가니 직장을 얻기는커녕 문화차이로 무식한 사람이 된 듯 했다”며 “이해는 하지만 정부의 관심도 처음 환영할 때만 반짝이었고 한국을 떠날 때쯤 우린 잊혀졌다”고 회상했다. 두 가족은 한국에서 2년을 살고 3년을 더 왔다갔다 하다가 2011년에 키르기스스탄으로 완전히 돌아왔다.
그럼에도 두 형제는 자식과 손주들이 한국과 가깝게 지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게오르기씨는 “우린 이미 나이가 많아 큰 도움을 줄 수 없지만 훗날 자식들이 한국에서 살고자 한다면 정부가 꼭 국적 취득 등 지원해줬으면 좋겠다”며 “나도 죽으면 화장해 한국 땅에 뿌려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형제는 비극적인 역사를 여전히 부인한 채 한국과 경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일본에게도 한 마디를 남겼다. 게오르기씨는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자랑스러우면서도 슬픈 분”이라며 “일본인들은 과거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우리의 역사를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 정상급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키르기스스탄을 공식방문한 이낙연 국무총리도 이날 허씨 형제를 동포·고려인 대표 간담회에 초청해 사과 인사를 했다. 이 총리는 “목숨바쳐 조국을 일구신 애국지사 후손 분들은 제대로 모시지 못해 큰 죄를 짓는 것 같다”며 “아직 충분히 모시지 못한 독립유공자를 더 찾고 후대에 기억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비슈케크(키르기스스탄)=김정원 기자 garden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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