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베트남 방문 당시 전용 차량에 탑승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로이터 연합뉴스

북한이 고급 리무진 등 사치품을 수입하는 데 90개국이 관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006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대북 사치품 수출을 금지한 유엔 대북제재의 허점이 고스란히 드러난 셈이다. 특히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소 애용하는 벤츠 메르세데스 등 고급차량이 평양으로 밀수입되는 과정에 한국, 일본 등 미국의 동맹국들도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민간단체 선진국방연구센터(C4ADS)는 16일(현지시간) 공개한 ‘호화판(Lux & Loaded)’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2015~2017년 90여개국이 북한에 대한 사치품 조달에 관여했다”며 “이는 과거 알려진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다”라고 전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 기간 전 세계 90개국이 북한 정권에 수출한 사치품은 약 51억6,938만달러어치로 추정됐으며, 이중 중국이 수출한 경우가 95%를 차지했다. 유엔의 수출통제 품목 기준으로 파악된 32개국, 1억9,101만달러와 큰 차이가 있다.

고급 차량 수출에는 러시아가 적극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 기간 러시아는 82 차례에 걸쳐 고급 차량 803대를 북한에 넘겼다. 러시아 UAZ사의 헌트, 패트리엇 등이 537대로 과반을 차지했지만, 일본 렉서스ㆍ도요타ㆍ닛산의 차량도 254대에 달했다. 메르세데스 벤츠의 GL500 등 고급차량 10대 역시 이 기간 네 차례에 나눠 북한에 수출됐다.

특히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C4ADS 보고서와 자체 취재를 통해 대당 50만달러(약 5억9,000만원)에 달하는 메르세데스 벤츠 마이바흐 S600 두 대가 북한으로 수출되는 경로를 구체적으로 추적해 보도했다. 두 고급차량을 실은 컨테이너는 화물선에 실려 지난해 6월 네덜란드 로테르담 항구에서 중국 다롄(大連)으로 향했다. 이 컨테이너는 7월 31일부터 8월 26일까지 다롄에 머문 뒤 일본 오사카(大阪)를 거쳐 9월 30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어 부산항에서 토고 국적 화물선 'DN5505호’로 옮겨져 러시아 나홋카 항으로 출발했다.

지난해 9월 평양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함께 벤츠를 타고 카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그러나 DN5505호는 이후 18일간 종적을 감췄다. 10월 1일 부산항을 출항한 뒤 자동선박식별장치(AIS)를 꺼버린 것이다. AIS 차단은 제재 회피 선박들이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이용하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이후 DN5505호가 AIS를 다시 켰을 때는 한국 영해로 돌아와 있었고, 나홋카 항에서 석탄 2,588톤을 적재한 뒤였다.

NYT와 C4ADS는 메르세데스 차량이 항공편으로 러시아에서 북한으로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지난해 10월 7일 북한 고려항공 소속 화물기 3대가 나홋카 항에서 멀지 않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는데, 메르세데스 차량이 이들 화물기에 실려 북한으로 수송됐을 것이란 얘기다. NYT는 특히 고려항공 소속 화물기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한 것은 이례적이고, 이들 화물기가 김 위원장의 해외 순방 시 전용차를 운송하는 데 이용됐다고 설명했다.

NYT는 또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적재됐던 것과 같은 기종의 메르세데스 마이바흐 S600 차량이 올해 1월 31일 평양에서 노동당 청사로 이동하는 장면이 포착됐다고 덧붙였다. 당일 김 위원장이 예술 대표단과 촬영한 사진에서도 같은 차량이 등장했다. 로테르담을 출발한 차량이 다롄, 부산 등을 거쳐 실제 평양에 도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한편 보도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지난 2월 러시아 나홋카 항에서 석탄을 싣고 포항에 입항한 DN5505호를 북한산 석탄을 운반했다는 이유로 조사 중이다. DN5505호는 벤츠 운반 작전이 수행되던 지난해 7월 ‘도영쉬핑’으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도영쉬핑은 북한산 석유를 운반해 대북제재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은 유조선 ‘카트린호’도 소유하고 있다.

손영하 기자 froze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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