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여신상이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앞을 내려다 보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이른바 ‘사법농단’ 혐의로 법정에 선 현직 법관들이 공소장에서 ‘등’이라는 표현을 빼달라며 검찰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또한 검찰의 공소장과 증거 등 절차적 문제를 놓고 다투다 혐의 내용에 대한 심리는 정상적으로 진행하지 못한 채 다음달 석방될 예정이다. 피고인의 방어권을 철저히 보장해야 하지만, 재판 절차에 대한 전ㆍ현직 법관들의 집착이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수준”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정운호 게이트’ 당시 구속영장 등 수사 내용을 유출한 혐의(공무상 비밀누설)로 재판에 넘겨진 조의연ㆍ성창호 부장판사 측은 지난 15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부장 유영근) 심리로 열린 3차 공판준비기일에서 “공소장에서 ‘등’이라는 표현을 빼달라”고 요청했다. 피고인 측 변호인들은 “내용을 구체적으로 특정하지 않으면 방어하기가 어렵다”면서 “굳이 ‘등’을 넣어 피고인을 불안하게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검찰은 “’등’이라는 표현은 수많은 사건의 공소사실에 들어간다”면서 “(기밀이 누설된) 보고서를 특정했기 때문에 방어 범위가 명확하다”고 반박했다. 재판부는 “이 자체로 공소장이 위법하다고 볼 순 없다”며 검찰의 손을 들어줬다.

사법농단 재판에서 피고인들은 검찰의 공소장이 불명확하다며 ‘등’이라는 표현에 유독 민감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첫 공판부터 “인사심의관 A ‘등’으로 하여금 보고서를 작성하게 하는 ‘등’ 의무없는 일을 하게했다”는 공소장 문장을 예로 들어 “‘등’은 둘 이상을 뜻하니 적어도 네 개의 행위가 있다는 것인데 알 수 있는 행위는 하나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재판만 빨리 하자는 건 골대를 세워놓지도 않고 축구하자는 것”이라면서 재판 일정이 촉박한 근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법농단 관련 재판들이 검찰이 제출한 공소장이나 증거들의 적법성 여부를 토씨 하나까지 확인하며 지체되자 “일반재판에서 이렇게까지 한 적이 있느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이례적으로 준비절차만 4개월이 걸렸던 양 전 대법원장 재판의 경우, 정식재판에서도 “검찰이 압수한 파일과 출력물의 글씨체가 다르다” 등 갖가지 주장을 확인하느라 실제 혐의는 제대로 다퉈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다음달 11일 구속기간(6개월) 만료를 앞두고 있다. 올 초 변호인단 전원 사임으로 한 달 가량 재판이 공전했던 임 전 차장 재판은 재판부를 못 믿겠다는 기피 신청으로 또 다시 한 달 넘게 멈춰 선 상태다.

사법농단 재판에서 쟁점이 된 ‘공소장 일본주의(재판부가 선입견을 갖지 않도록 공소장 외 서류나 증거물을 첨부해선 안 된다는 원칙)’ 논란 또한 여전히 재판부의 발목을 잡고 있다. 15일 조의연ㆍ성창호 부장판사 측은 “공소장에 힘이 많이 들어갔다”는 재판부 지적을 받아 검찰이 새로 제출한 공소장에 대해서도 “여전히 피고인들과 관계 없는 부분들이 있다”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재판부는 “공소장 일본주의 논란 자체가 많은 국민들이 보고 있는 데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부분이 있다”고 일갈했다. 피고인의 명예, 소송경제적 측면까지 거론하며 “이 정도면 본안 판단을 받겠다고 하는 것이 맞지 않냐, 국민들이 보기에도 그렇다”고 조언했다.

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사회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