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 거란어 사전 낸 김태경 금융감독원 국장
김태경 금융감독원 국장. 김 국장 제공

“우리는 거란족을 ‘오랑캐’ 정도로 치부하고 있지만, 편견을 거두고 그들 언어를 이해하면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보다 심층적으로 연구할 수 있습니다.”

김태경(56) 금융감독원 국장의 취미 겸 부업은 ‘거란어 연구’다. 본업인 ‘금융감독’과는 상당히 이질적인 분야인데, 이를 설명하려면 생의 전환점이 됐던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82년 한국은행에 입사한 김 국장은 그해 한은 구내도서관에서 일본학자가 쓴 ‘요제지연구’라는 고서적을 우연히 발견하게 됐다. 10~12세기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를 다룬 책이었다.

평소 한문과 일본어에 밝았던 김 국장은 책을 빌려 보름 내내 탐독했다. 그 결과 오랑캐로만 알고 있었던 거란족이 체계적인 법과 제도를 갖췄으며, 고유의 문자도 만들어 썼단 사실을 알게됐다. “지금까지 역사를 잘못 알았다”는 충격에 김 국장은 그해 곧바로 단국대 대학원에 진학해 거란족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1996년 제2금융권 감독기구인 옛 신용관리기금(금감원으로 통합)으로 이직한 뒤에도 연구는 이어졌다.

근 30년 연구의 결실로 김 국장은 최근 700쪽 분량의 ‘거란소자사전’이라는 거란어 사전을 펴냈다. ‘거란소자(小字)’는 거란족이 초기에 썼던 문자인 ‘대자(大字)’가 발전한 것으로,약 900년대 초부터 쓰인 것으로 전해진다. 알타이계 언어인 거란어는 얼핏 보기엔 한자와 비슷하지만, 실제론 한자 부수를 변형한 형태의 문자 400여개를 결합해 의미를 만드는 표음문자다. 글자를 만드는 원리로 보면 표의문자인 한자보다는,자음과 모음을 결합하는 한글에 가까운 셈이다.

김 국장은 17일 본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거란이 패망한 뒤엔 종이로 된 사료가 대부분 소실된 탓에 묘지명이나 비석 등에 쓰인 글자를 모아서 사전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번 사전은 김 국장이 추정하기로 “거란어를 사전 형태로 다룬 세계 최초의 결과물”이다.거란사 연구가 비교적 활발한 중국ㆍ일본과 달리, 거란족을 연구하는 사람이 극히 드문 우리나라에서 이런 결실을 맺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앞서 그는 2016년 중국 역사학자들이 쓴 ‘거란소자연구’(1985년)란 책을 번역해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김 국장은 거란어 연구가 우리 역사를 깊이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거란은 고구려와 발해에 종속된 적이 있고, 고려와는 국경을 접하면서 전쟁을 치르는 등 한국사와 관계가 깊다. 때문에 거란어를 연구하면 새로운 시각에서 고대사를 탐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 국장은 “국내에선 거란 연구에 대한 수요가 없어 이대로 가면 거란의 역사는 영영 파묻힐 수밖에 없다”며 관심을 촉구했다.

금감원에서 중소서민금융 등 제2금융권 감독업무를 주로 담당해 온 김 국장은 퇴임을 4년 앞두고 있다. 그는 “업무에 지장을 줄 순 없었기에 밤 늦은 시간이나 휴일에 연구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은퇴하면 본격 연구에 매진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서울 외곽에 작은 연구소도 만들어 관심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 문호를 개방하기로 했다. 김 국장은 “거란 문자 중 뜻이 해독된 건 60~70%에 불과하다”며 “물음표가 달린 나머지 글자 중 단 몇개라도 직접 해독하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재진 기자 blanc@hankookilbo.com

올해 1월 김태경 국장이 펴낸 '거란소자사전'.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제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