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귀신들의 천국
※ 인사할 때마다 상대를 축복(슬라맛)하는 나라 인도네시아. 2019년 3월 국내 일간지로는 처음 자카르타에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는 격주 목요일마다 다채로운 민족 종교 문화가 어우러진 인도네시아의 ‘비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ㆍ다양성 속에서 하나됨을 추구)’를 선사합니다.
입구 엘리베이터에 최근 개봉 예정 공포 영화 포스터가 도배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도심의 현지 영화관 풍경.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인도네시아 영화는 장르가 두 가지다. ‘호러(공포) 영화와 공포 영화가 아닌 영화.’

과장이 아니다.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자카르타 도심 블록엠(Block M) 플라자의 영화관만 가 봐도 알 수 있다. 외화를 뺀 최근 개봉 예정 현지 영화 두 편이 모두 공포 영화다. 영화 ‘지옥으로 나를 따르라(Ikut Aku ke Neraka)’ ‘빨간 문(Pintu Merah)’ 포스터가 상영관 통로에 나란히 붙었고, 극장 입구 엘리베이터는 마치 지옥문처럼 공포 영화 포스터로 도배했다. 7월 여름 특수를 겨냥한 납량물 아니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다. 인도네시아는 우리 식으로 따지면 1년 내내 여름이다.

인도네시아인들의 공포 영화 사랑은 통계 수치로도 입증된다. 지난해 공포 영화 관람객 비중은 전체 현지 영화의 36%를 차지했다. 2018년 개봉된 현지 영화 129편 중 50편 이상이, 심지어는 그 해 상반기 흥행 상위 10편 중 7편이 바로 공포 영화였다. CJ CGV의 현지법인 CGV인도네시아 관계자는 “현지 영화의 60%가 공포 영화일 때도 있다”라며 “제작비가 적게 들고, 소재가 다양하고, 많이들 보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요소가 두루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도심의 현지 영화관 통로에 붙은 최근 개봉 예정 공포 영화 포스터와 상영관 입장을 기다리는 관객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인도네시아는 귀신들이 사람 주변에 같이 산다고 여전히 믿는 나라다. 대명천지에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눙칠 수 있겠으나 엄연한 현실이다. “몇 년 전만 해도 귀신을 잡았다는 기사가 정규 방송 뉴스 시간에 나올 정도였다”(배동선 작가)고 한다. 빈 유리병을 보여주며 ‘영안(靈眼)이 트인 사람만 (귀신을) 볼 수 있다’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귀신 들린 걸로 의심되는 집을 마을 주민들이 습격하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귀신 흉내를 내다가 경찰에 잡혔다는 청소년들 얘기는 한국 언론에 소개(2018년 10월)되는가 하면, 최근에도 현지 유력 매체에 심심치 않게 실리고 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경찰, 중부자바주(州) 퍼말랑에서 주민들의 포쫑(pocong) 유령 목격담이 잇따라 순찰 강화 도중 포쫑으로 분장하고 운전자들을 겁주던 15세 소년 체포”(콤파스, 5월 26일 보도), “자카르타 남쪽 도시 데폭에서 흰색 가루 뒤집어쓰고 아기 유령인 투율(tuyul) 행세하던 13세 소년 길거리범죄전담반이 검거 뒤 훈방, 소년 ‘유튜브 촬영이 목적’”(자카르타포스트, 7월 14일 보도). 시신을 하얀 천으로 꽁꽁 묶고 얼굴만 드러낸 뒤 매장하는 인도네시아 장례 풍습에서 유래한 포쫑과 남의 재산을 훔쳐 주인에게 줘 부자로 만든다는 투율은 인도네시아 대표 귀신이다.

최근 흰색 가루를 뒤집어쓰고 아기 유령 투율 행세를 하다 경찰에 붙잡힌 13세 인도네시아 소년. 자카르타포스트 캡처

현지 한인들의 음산한 경험담도 떠돈다. 봉제 공장에서 일하던 한 노동자가 갑자기 귀신 들린 것처럼 평소 구사하지 못하던 외국어를 하자 전체 노동자들이 도미노처럼 픽픽 쓰려져 소름이 돋았다거나, 자카르타 도심의 한 고층 빌딩은 귀신이 득시글거려서 아무도 입주하지 않아 흉물이 됐다는 설들이다. 물론 한인들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꽤 있지만 부풀려졌거나 미신 아니겠느냐”라며 “집단 영양 실조나 부실 공사가 실제 원인”이라고 합리적 근거를 댄다.

아주 오래 전 우리네 할머니가 머리맡에서 들려주던 귀신 전설이 우리 전통문화의 디딤돌이듯 인도네시아의 귀신들은 현지 문화를 이해하는 키워드다. 각종 토착 종교에 기대어 살던 수많은 종족이 불교와 힌두교를 받아들이고 다시 이슬람교로 재편되며 독특한 종교 문화를 형성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것은 종교의 다양성과 상호 존중, 전통과의 조화로 설명할 수 있겠다.

지난 5월 죽음을 형상화한 귀신 포쫑 분장을 하고 사람들을 겁주다 경찰에 잡힌 15세 인도네시아 소년. 콤파스 캡처

인도네시아에서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은 안선근(55) 국립이슬람대(UINㆍ우인) 교수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공인한 종교는 6개(이슬람교 기독교 천주교 불교 힌두교 유교)지만 인도네시아를 구성하는 300여 종족이 믿는 종교는 애니미즘 샤머니즘 토테미즘 등 100여개나 될 만큼 다양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구의 87%(약 1억8,000만명)에 달하는 인도네시아 무슬림도 매일 5번 기도 시간에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멀리하라’는 코란 구절을 암송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전통 문화와 무속 신앙이 깃든 인도네시아의 이슬람교는 아랍계 정통 이슬람교와 달리 세속적이고 유연하다. 강경 무슬림과 샤리아(이슬람 관습법)가 지배하는 아체특별주(州)도 존재하지만 어디까지나 일부다. ‘비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ㆍ다양성 속 통일성)’라는 국가 이념 아래 각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협력적인 관계를 지향한다. 귀신이라는 존재는 그 융통성과 포용성을 먹고 마시며 아직 살아있는 셈이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도심의 현지 영화관에 붙은 최근 개봉 예정 공포 영화 포스터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다만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전된 인도네시아 대도시 시민들은 귀신들의 존재를 믿지 않는 추세다. 그저 영화 같은 문화로 소비할 뿐이다. 지방인 잠비에서 태어나 자카르타에서 직장을 다니는 아리(37)씨는 “고향 사람들, 특히 고령자들은 여전히 귀신을 쫓는 퇴마 의식을 하지만 학력이 높고 젊은 사람들은 고개를 흔든다”고 말했다. 믿는 이들이 점차 줄어들면 수천 종에 이른다는 인도네시아의 귀신들도 시나브로 사라질 것이다. 귀신이란 그런 존재니까.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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