웡익모 민간인권진선 부의장 방한
“현시점 가장 중요한 이슈는 경찰의 폭력”
1일 입법회 점거 ‘분열론’ 사실 아냐 “홍콩은 하나”
“한국은 민주주의 롤모델… 관심 가져달라”
“최루탄이 뭐야?”
2014년 6월의 마지막 날, 특별한 직업 없이 게임에 몰두하던 29살 홍콩 청년은 게임 대기 시간에 휴대폰으로 뉴스를 훑어봤다.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tear gas)를 쐈다’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최루탄이 뭐지? 무슨 일이 터졌나?’ 잠시 고민하던 청년은 다시 게임을 시작했다. 다음날 청년의 친구는 “시위에 함께 나가자”고 메시지를 보냈고 청년은 호기심에 “그러자”고 답했다. 2014년 9월부터 본격화된 홍콩의 민주화 시위인 ‘우산혁명’을 앞두고 학생 시위가 홍콩 곳곳에서 열리던 시절, 현재 홍콩의 송환법 반대 시위를 조직하고 있는 민간인권진선(民間人權陣線, Civil Human Rights Front)의 웡익모(黃弈武ㆍ34) 부의장이 난생 처음 시위에 나갔던 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친중 인사 후보군에 대한 행정장관 간접선거에 반대하며 직선제를 요구한 대학생과 시민들의 틈바구니에서 웡 부의장은 “홍콩의 다른 모습을 봤다”고 말했다. 자주 시위에 나오지 못하는 직장인들은 마스크나 방석, 음료 따위를 사서 학생 시위대에게 나눠주었다. 웡 부의장은 당시 “홍콩에서 어떤 대가 없이 물건을 나눠주는 사람의 모습을 처음 봤다”고 회상했다. 경쟁에서 살아남아 돈을 악착같이 버는 게 삶의 목표고 ‘효율’이 곧 최선인 자본주의적 세계가 아니라 연대하고 상생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시위 속에서 확인한 것이다. 웡 부의장이 활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웡 부의장은 우산혁명 이후 5년만에 100만명이 넘게 모이는 대형 시위가 다시 홍콩 한복판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해서 “기적이 일어난 것만 같다”고 밝혔다. 중국으로 범죄자 신병을 넘길 수 있는 범죄인 인도법안 개정안이 홍콩 정치범을 합법적으로 ‘납치’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퍼지면서 남녀노소 다양한 계층의 홍콩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3월 첫 시위 당시에는 1만 2,000명에 불과했던 참가자 수가 4월엔 13만명, 6월 9일엔 100만명에 달했다. 웡 부의장은 “처음엔 거리에서 전단을 나눠주고 인터넷으로 시위를 홍보하며, 가능한 모든 조직망을 동원해 사람들을 모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홍보가 없어도 사람들이 거리로 절로 모였다”고 말했다.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이 2014년 우산혁명 때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는 게 웡 부의장이 이야기다. 웡 부의장은 “경찰은 평화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면서 오히려 시위대를 ‘폭도’라고 규정하고 있다”며 “경찰이야말로 폭도”라고 말했다. 웡 부의장은 홍콩 경찰이 무장하지 않은 평화적인 시위대를 향해 최루가스에 고무탄까지 사용했지만 이에 대한 시민들의 방어를 공권력에 대한 폭력으로 포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웡 부의장은 “불법적인 진압에 나선 경찰은 경찰 번호와 뱃지를 의도적으로 가리기도 했는데, 이는 지휘관의 용인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웡 부의장은 “그렇기 때문에 시위대의 5가지 요구 사항 중 ‘경찰에 대한 독립기구의 조사’가 현 시점에서는 가장 중요한 의제”라고 설명했다. 시위대는 홍콩 정부에 △송환법 철폐 △강경 진압 책임자 조사와 처벌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하지 말 것 △체포 시위대 석방 △행정장관 사퇴를 요구해왔다. 캐리람(林鄭月娥) 홍콩 행정장관은 9일 “송환법은 죽었다”며 시위대의 요구에 한발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시위대에 경찰 진압에 관해 뾰족한 답변은 내놓지 않았다. 웡 부의장은 “강경 진압에 대한 조사를 정부 조직에 맡기면 제대로 이뤄질리 없다”며 “은퇴한 고위 법관이 이끄는 독립적인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경찰의 과잉 진압에 대한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밝혔다.
일부 시위대의 1일 입법회 점거 시위에 대해서도 웡 부의장은 “시위대의 분열이 아니라, ‘연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웡 부의장에 따르면, 우산혁명 당시의 비폭력 투쟁 이후 사회 운동 세력은 강경 투쟁을 지향하는 이들과 평화 노선을 택한 이들로 갈려 반목했다. 강경파 중에는 온건파를 없애야 홍콩의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웡 부의장은 그랬던 강경파가 홍콩 반환 22주년인 1일 시위에 참여했으며, 입법회를 점거한 후에도 온건파가 주장해온 ‘보통선거’를 요구사항으로 발표했다며 “강경파와 온건파는 보통선거가 공통의 목표라는 걸 알게 됐으며 이제 서로를 비난하지 않고 공통의 목표를 위해 싸운다”고 밝혔다.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 초청으로 한국을 찾은 웡 부의장은 “한국은 민주주의의 롤모델”이라며 한국 시민들의 관심과 지지를 호소했다. 그는 한국의 독재정권과 민주화 운동을 다룬 영화 ‘1987’, ‘변호인’, ‘택시운전사’ 등은 홍콩에서 ‘한국 민주주의 3부작(trilogy)’으로 불리며 어느 시민단체에서는 단체 관람을 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웡 부의장은 “한국에서도 군부독재시절 공권력의 폭력이 심각했고 목숨을 잃은 이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다”며 “우리는 2019년에 그런 광경이 홍콩에서 재현되길 바라지 않는다. 비슷한 경험을 한 한국 시민들의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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