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주막집 노파와 내제자 황상 
'독례통고'에 적힌 다산의 메모는 1802년 4월 30일부터 시작된다. 임술년 4월 말일을 뜻하는 '임술사월회'(왼쪽 사진)이 적혀 있다. 날짜는 물론 어떤 때는 시간도 적어두었다. 또 메모에는'병중(病中)'이나 '강진적중(康津謫中)'이란 말도 등장한다. 아픈 와중에도 기록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정민 교수 제공
 ◇앵두와 죽순 

1802년 여름, 현감 이안묵은 기어이 하찮은 꼬투리를 잡아서 다산을 상부에 무고했다. 애초에 있지도 않던 일이어서 조사를 해도 사실이 안 나오자 제풀에 시들해졌다. 이안묵은 탐욕스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다산이 워낙 몸을 사리고 아예 꼼짝도 하지 않자 이안묵으로서도 한 차례 무고가 무위에 그친 뒤로는 시들해져서 더 이상 다산을 손대지 않았다.

그는 1803년 12월 15일에도 강진 현감에 재직 중이었다. 당시 전라 감사 한용귀(韓用龜)가 중앙에 올린 인사고과 계본(啓本)에, 이안묵에 대해 “일을 맡기는 것은 뇌물에서 나오고, 원망은 탐욕에 말미암아 생겼다. 하(下)입니다(任出貨賄, 怨由貪饕. 下)”라 한 것만 보더라도 그의 사람됨이 드러난다. 그는 뇌물로 아래 사람을 부리고, 탐욕 때문에 백성의 원성을 샀다. 그는 호남 전체에서 가장 나쁜 점수를 받아 이때 현감 자리에서 쫓겨난 듯하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804년 권유(權裕)의 흉소(凶疏) 사건에 동조한 죄로 체포되어 대역부도로 사형을 당해 죽었다.

4월 10일 무렵 큰아들 정학연(1783~1859)이 아버지를 뵙기 위해 강진으로 내려왔다. 그는 이제 갓 스무 살이었다. 앞선 편지에서 다산이 말을 타고 오라고 한 것은 강진에서 진행할 작업에 필요한 책을 말에 싣고 와야 해서였다. 이 인편에 장기로도 갔다가 올라온 서건학(徐乾學)의 ‘독례통고(讀禮通考)’를 비롯한 몇 가지 책들이 배달되었다.

정학연의 시집 ‘삼창관집(三倉館集)’을 통해 볼 때 이때 정학연은 강진에 고작 며칠 남짓 머물다가 바로 상경했다. 다산은 아들을 데리고 모처럼 구강포와 백련사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 여름이 막 시작되어 초록이 눈부셨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앵두와 죽순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는데, 노파가 백방으로 구해봐도 둘 다 제철이 지나 구할 수가 없었다. 다산은 아들에게 자신이 지금 진행 중인 공부에 대해 설명하고, 틈만 나면 공부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하직하고 나주에 이르러 시장에서 앵두 파는 것을 보고 아버지 생각이 나서 눈물을 삼켰다.

 ◇적막한 방안의 메모 

아들 정학연이 다녀간 뒤 쓴 편지에서 다산은 “온종일 흙덩어리처럼 앉아서 사람 말소리나 수레나 발자국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지 않게 한 뒤야, 경전과 예학의 정밀한 뜻을 비로소 얻을 수 있는 법이다”라고 썼다. 빚어놓은 소상처럼 앉아 책 속에 빠져드니 창 밖의 소리가 사라지고 방안은 태고의 적막 속으로 빠져들었다.

글을 읽다가 생각이 떠오르면 책의 여백에 그 생각을 붙들어두었다. 당시 유배지에서 다산이 읽었던 ‘독례통고’가 영남대학교 도서관 동빈문고 속에 남아있다. 이 책의 곳곳에 다산의 메모가 적혀있다. 짧은 한 도막의 글에서 엔간한 논문 한 편에 가늠할 내용을 담기도 했다. 이 책에 실린 다산의 메모는 1802년 4월 30일부터 시작해서 그해 9월까지 적은 것이 가장 많다. 각각의 메모마다 다산은 날짜를 적었고, 어떤 때는 시각까지 기록해두었다. 어쩌다 메모 곁에서 ‘병중(病中)’이나 ‘강진적중(康津謫中)’이란 말이 나오기도 한다. 아픈 중에도 기록했다. 1804년 9월 12일의 메모 끝에는 ‘억무아(憶武兒)’라고 썼다. 무아는 큰아들 정학연의 아명이었다. 글을 쓰다가 큰아들 생각이 났던 모양이다.

이렇게 메모를 차곡차곡 쌓아가며 공부를 해도 그 결과를 두고 토론할 한 사람이 없었다. 율정에서 헤어질 때 다산 형제는 작은 옥도장을 하나씩 나눠 가져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에 신표로 찍기로 했다. 다산은 인편이 구해질 때마다 형님 정약전에게 옥도장이 찍힌 편지를 보냈다. 자신의 초고를 통째 보내 교정을 부탁하기도 하고, 해결 안 되는 문제에 대해 토론을 요청하기도 했다. 다산시문집에 수록된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가 17통인데, 한중연본 ‘여유속집(與猶續集)’ 제4책에 이 편지에 대한 정약전의 답장 14편이 실려 있다. 비용 때문이었겠지만, ‘여유당전서’ 편찬 당시 정약전의 답장 편지를 모두 빼버리는 통에 학계가 지금까지 이 편지의 존재를 잘 알지 못했다.

'독례통고'를 읽으며 남긴 다산의 메모는 빽빽하다. 어느 날 메모 끝에는 강진에서 유배 중임을 뜻하는 '강진적중(康津謫中)'(위 사진)이라고 썼다. 1804년 9월 12일의 메모 끝에는 '억무아(憶武兒)'라는 단어가 보인다(아래 사진). 무아는 큰아들 정학연의 아명이었다. 책을 읽다 큰 아들을 떠올린 듯하다. 정민 교수 제공
 ◇외상 장부와 주막집 노파와의 토론 

그나마 말벗이 되어주는 것은 주막집 노파였다. 하루는 밥상을 받는데, 벽에 손톱으로 긁은 듯한 어지러운 표시가 있었다. “할멈! 이게 뭔가?” “외상으로 받을 돈을 표시해 두었습니다.” 읽는 방법을 들은 다산이 깔깔 웃었다. “주먹구구라더니, 이래서야 어찌 누가 얼마나 외상을 졌는지 알 도리가 있겠나?” “까막눈이 무슨 수가 있답니까? 아쉬운 대로 그리 하는 게지요.” 식사를 마친 다산이 자기 방으로 건너가 한 참 만에 도로 나와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앞으로는 여기에다 표시하도록 하게.” 할멈이 가로 세로로 칸이 쳐진 종이 한 장을 받았다. “내 말을 잘 듣게나. 이쪽 세로 칸이 돈을 받아야 할 사람 이름일세. 내게 이름을 대게. 언문으로 써줄 테니. 그리고 이쪽 가로 칸에는 날짜를 적어야지. 위에 숫자를 순서대로 써둘 테니 모르겠거든 보고 쓰게. 받을 돈은 작대기로 그어 표시하게나. 돈을 받았거든 줄을 그어 받았다는 표시를 하게. 이렇게 하면 잊어버리지도 않고 간편할 걸세.” 할멈의 입이 함박만하게 벌어졌다.

할멈은 인정스럽고 총명했다. 하루는 그녀가 종일 공부만 하다가 밥 먹으러 나온 다산에게 불쑥 물었다.

“나으리 제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부모의 은혜가 같다 하나 제가 보기에는 어미의 수고가 훨씬 큽니다. 그런데 성인의 가르침을 보면 아버지는 무겁고 어머니는 가볍게 여깁니다. 성씨도 아버지를 따르고 상복도 어머니를 더 가볍게 입습니다. 외가 쪽은 아예 일가로 치지도 않고요. 잘못된 것이 아닌지요?”

다산이 대답했다.

“아버지가 나를 낳아주신 분이라 그런 걸세. 어머니의 은혜가 중해도 나를 처음 나게 해주신 은혜가 더욱 중해서라네.”

할멈이 지지 않고 말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요. 초목으로 치면 아버지는 씨앗이고 어머니는 땅입니다. 씨를 뿌려 땅에 떨어뜨리는 것은 힘들 게 없지요. 하지만 땅이 양분을 주어 기르는 공은 아주 큽니다. 그래도 조를 심으면 조가 되고, 벼를 심으면 벼가 되니, 땅이 씨앗을 길러주어도 모든 종류는 씨앗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지요?”

다산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생각이었다. 다산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할멈! 내가 오늘 크게 배웠네. 자네 말이 백번 옳으이.”

다산은 할멈과의 이날 문답을 적어 흑산도의 정약전에게 적어 보냈다. 정약전 또한 할멈의 이야기에 공감하면서 이런 답장을 보내왔다. “주인 할멈의 논리는 내가 일찍이 궁리하여 따져 보았지만 도달하지 못했던 것이니,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내제자 황상과의 첫 대면 

현감 이안묵이 토색질에 혈안이 되어 다산을 내버려 두자, 주위에서도 다산에 대한 경계를 슬며시 풀었다. 1802년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이날 따라 밖이 유독 소란스러웠다. 아이들 몇이 우물 앞 너른 길에서 공차기를 하고 있었다. 무료했던 다산이 문을 열고 나와 아이들을 손짓해서 불렀다. 서울 나으리가 자신들을 부르자 아이들은 제풀에 자기들이 시끄럽게 굴어 혼내려는 줄 알고 겁을 잔뜩 집어먹었다. 아이들이 다산 앞에 섰다. 숫기가 많아 보이는 소년 하나만 오지 않은 채 저만치서 뻘쭘하게 서 있었다. 다산이 다시 세 번을 거듭 부르고서야 소년은 다산 앞에 섰다.

“어른을 뵈었거든 인사를 해야지.” 소년이 인사를 올렸다. 다산이 다시 이름과 나이를 묻고 책을 어디까지 읽었느냐고 물었다. 대답을 들은 다산은 마침 날이 뉘엿했으므로 다른 아이들은 가게 하고, 그 소년을 방으로 데려갔다.

“공부하는 서당이 어디냐?” 그러더니 다산이 다시 입을 뗐다.

“네가 여기서 지내며 내 심부름을 할 수 있겠느냐?”

소년이 일어나더니 야무지게 대답했다.

“부모님이 계시니 부모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알았다. 내일 다시 오너라.”

소년은 집에 돌아가 아버지에게 좀전의 일을 말씀드렸다. 아버지 황인담(黃仁聃)은 강진현의 아전이었고, 소년의 이름은 황상(黃裳ㆍ1788~1870)이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이것은 바늘과 겨자씨가 서로 끌어당기는 격이다. 너는 가서 그분을 모시도록 해라. 하지만 스승과 제자의 의리는 중한 법이니 조심조심 삼가서 뜻을 거슬리거나 게을러서는 안 된다.”

이튿날 아침 황상이 다산을 주막으로 찾아 뵙고 아버지의 뜻을 말씀드렸다. 다산은 별 내색 없이 “그러냐”는 한마디만 했다. 이날부터 황상은 다산의 내제자가 되어 스승과 침식을 함께 하며 지냈다. 스승은 황상에게 경전의 책을 베껴 쓰게 하는 한편, ‘단궁(檀弓)’ 편을 하나하나 강의해 주었다.

황상과 다산이 만나는 이 첫 번째 장면은 2012년 황상의 후손인 황수홍 선생 집안에서 ‘치원소고(巵園小藁)’가 새로 발견됨으로써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이 책에 실린 ‘상유산선생서(上酉山先生書)’, 즉 다산의 맏아들 정학연에게 보낸 편지에서 황상은 스승과 자신의 첫 만남의 장면을 곡진하게 묘사했다.

다산이 강진 동문 매반가에 머문 지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다산은 곁에서 먹도 갈고 정리 작업도 도와줄 손길이 요긴했다. 해배는 쉬 바랄 수 없어 어차피 장기전에 대비해야 했다. 그러자면 제자를 받아 공부를 가르쳐 쓸만한 인재로 키워낼 필요가 있었다. 늘 주막 앞거리에서 공차며 놀던 아이들 중에 황상을 눈여겨보아 두었다가 이날 그를 콕 짚어서 내제자로 들어 앉힌 것이다.

다산과 황상이 처음 만난 날은 1802년 10월 10일, 당시 황상의 나이는 15세였다. 이날 이후 황상은 1808년 다산이 초당으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다산 곁을 지키고 다산 곁에서 잤다. 나중에 둘은 부자처럼 되어, 황상이 장가들 때 혼서지도 내가 아니면 누가 쓰겠느냐며 다산이 자청해서 써주었다. 결혼해서 아들을 낳자 이름도 다산이 지어 주었다. 다산은 황상을 피붙이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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