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유색인종 하원의원 4명에게 ‘막말’
대선 승리 원동력 ‘반이민ㆍ반외국인’ 정서 자극
내년 11월 치러지는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인종주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불법 이민자를 겨냥한 대규모 단속이 시작된 날, 민주당 내 유색인종 하원의원 네 명에게 “너희 원래 나라로 돌아가라”고 ‘막말’을 퍼부은 것이다. 언론의 집중포화, 야당 지지층 결집 등 온갖 부작용을 감수하면서까지 트럼프 대통령이 이 같은 발언을 내놓은 건 인종주의가 백인 유권자의 표를 끌어들인다는 확신이 깔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14일(현지시간) 트위터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부패하고 무능한, 최악의 국가 출신인 ‘진보’ 민주당 여성의원들이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미국의 운영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 말한다”라며 “원래 나라로 돌아가 완전히 망하고 범죄로 들끓는 출신지를 바로잡으면 어떤가”라고 했다. 몇 시간 뒤에는 다시 트위터에 “우리나라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을 민주당원들이 옹호하는 모습을 보면 참 슬프다”라며 “그들이 미국에 대해 하는 역겨운 말과 끔찍한 것들이 허용돼선 안 된다”고 적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민주당 여성의원’이 누구인지 명시적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등 지난해 당선된 초선 하원의원 4인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오카시오-코르테스 의원은 푸에르토리코계, 일한 오마르 의원은 소말리아계 무슬림, 라시다 틀라입 의원은 팔레스타인 난민 2세, 아이아나 프레슬리 의원은 흑인이다. 이중 오마르 의원만이 소말리아에서 태어나 내전 중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나머지 세 명은 모두 미국에서 태어났다. 이들은 즉시 “미국이 내 나라”라며 반격에 나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4명의 의원이 최근 이민자 보호를 위한 36억달러(약 5조4,000억원)의 긴급 구호 예산에 반대한 점을 트집 잡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민주당과 공화당 지도부가 합의한 국경지대 긴급 예산지원이 트럼프 대통령의 반(反)이민 정책 추진을 도와주는 꼴이라며 당내 수장인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과 대립해왔다. 펠로시 의장과 오카시오-코르테스 의원이 서로를 저격하는 언론 인터뷰까지 해 갈등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상태였다.
이에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트럼프 대통령이 난장판이 벌어진 민주당 내 긴장을 이용하려 했을 수 있지만, 민주당원들에게 공통의 적을 준 꼴이 됐다”고 분석했다. 민주당 내 갈등을 부추기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결집만 도왔다는 얘기다. 펠로시 의장은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은 외국인 혐오 발언”이라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계획이 언제나 ‘미국을 다시 하얗게’임을 재확인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정말로 펠로시 의장의 이 같은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오히려 민주당 결집 효과를 예상하면서도 인종주의 카드를 꺼내 들었을 확률이 높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올린 트위터 말미에 “만약 민주당이 계속해서 치욕적인 행동을 한다면, 우리는 당신을 2020년 투표함에서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적었다. 여성의원 4인을 ‘꼴 보기 싫어하는’ 백인 유권자들에게 자신을 뽑아달라고 노골적으로 호소한 것이다.
‘반이민ㆍ반외국인’ 정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2016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주요 원동력 중 하나였다. 그는 출마 일성부터 미국 시민권을 지닌 히스패닉 유권자를 ‘멕시코인’이라고 불렀고, 주요 공약으로 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을 내세웠다. 이슬람국가(IS)의 굵직한 테러가 있을 때마다 “무슬림 입국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심지어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출생에 대한 거짓 주장도 일삼아왔는데, 민주당의 돈 바이어 하원의원 이날 트위터에서 “트럼프는 오바마를 저격했던 것과 똑같은 ‘버서리즘(Birtherism: 오바마가 미 시민권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음모론)’을 여성 하원의원들에 적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CNN방송은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을 위해 이민배척을 통한 분열을 계획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며 “그의 이번 공격은 인종적, 사회적 분열을 이용하는 선거전략의 확장”이라고 지적했다. 공교롭게도 이날 미 이민세관단속국(ICE)은 트럼프 대통령이 예고한 대로 미 주요 10개 도시에서 대대적인 불법 이민자 단속에 착수했다.
손영하 기자 froze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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