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패션 시장에서 여성복은 남성복보다 시장 규모가 2.5배나 큽니다. 내년에 해외사업부터 여성복 라인을 육성해 나갈 계획입니다.”
한국 패션계에선 드물게 올해 12년 연속으로 ‘파리컬렉션’을 개근한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글로벌 브랜드 ‘준지(Juun.J)’의 정욱준 디자이너(상무). 뉴욕, 런던, 밀라노와 함께 ‘세계 4대 컬렉션’으로 불리며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파리컬렉션의 ‘단골 손님’이자, 국내에 30여년의 경력을 가진 베테랑 디자이너지만 “여전히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으로 고통이 따르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지난달 파리에서 개최한 ‘2020 S/S(봄∙여름)시즌 컬렉션’은 그의 고민이 고스란히 드러난 무대였다. 민소매 티셔츠를 입은 한 여성 모델이 스커트인지 팬츠인지 모를 옷을 툭 걸쳐 입은 모습은 파격적이었다. 그 속엔 비밀이 숨어 있다. 힙색(허리 부문에 걸치는 가방)에 나일론 소재로 만든 초경량 점퍼를 만들어 붙여 놓았다. 날씨에 따라 점퍼가 됐다가, 스커트가 되기도 하는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정 상무가 이번 컬렉션에서 지향한 ‘미래의 패션’을 가장 강렬하게 전달한 의상이었다.
정 상무는 이처럼 여성복을 새로운 도전으로 삼았다. 그는 지난 30여년 간 남성복에 집중했고, 현재 뉴욕, 런던, 파리, 밀라노, 홍콩 등 30개국 100여개 매장을 둘 만큼 성공을 맛봤다. 올해부터 여성복 라인에 힘을 주고, 내년엔 해외 매장 위주로 여성복 판매를 더 넓힐 계획이다. 그래서 내달 파리로 다시 날아간다. 여성복을 위한 현지 매장도 넓히고 판매를 위한 에이전트도 직접 발굴하기 위해서다.
“여성복으로 확장한다고 해서 저의 주무기인 ‘오버사이즈’ 룩을 벗어나진 않을 겁니다. 이번 컬렉션에서도 오버사이즈를 기반으로 캐주얼하고 스포티한 감각을 녹여냈으니까요. 여성 컬렉션에서도 수트를 강조하고, 와이드 바지를 디자인해 저다운, 즉 ‘준지’다운 디자인을 선보일 겁니다.”
정 상무가 이번 파리컬렉션에서 또 하나 신경 쓴 게 있다면, 바로 “테일러링(재단∙주어진 대상에 딱 맞게 줄이거나 늘리는 것)”이다. 가봉하기 힘든 가죽으로 점프수트(상의와 하의가 붙은 옷)를 제작하는 등 테일러링을 강조한 의상에 힘을 줬다. 이유가 있었다. 자신만의 아이덴티티(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을 보여주고 싶었다.
2007년 첫 파리컬렉션 무대를 밟았을 때 현지 언론 ‘르 피가로’는 그를 ‘주목 받은 디자이너’로 꼽았다. 이때 그는 테일러링을 기본으로 당시에는 생소했던 ‘오버사이즈 트렌치코트’를 내세워 호평 받았다. 정 상무는 “앞으로 3~4년은 오버사이즈나 캐주얼한 디자인이 유행할 것”이라면서도 “결국은 디자인의 기본인 테일러링 시대가 다시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테일러링을 기반으로 한 디자인은 영속성이 있다”고 정의한다. “테일러링이 능숙한 디자이너는 캐주얼이나 스포츠복 등을 다 제작할 수 있지만, 그런 기술이 없으면 자멸할 수 있다”고 잘라 말한다. ‘샤넬’이나 ‘디오르’처럼 우리나라에 영속성 있는 브랜드가 없다는 것도 이러한 현실을 보여준다는 것. 정 상무는 “해외 컬렉션 무대에 나가면 한국의 젊은 후배들이 없어 아쉽다”며 그 이유를 “나만의 것이 없다는 게 치명적”이라고 쓴소리를 했다.
이는 유행이나 돈벌이에 치중하면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도전하는 세계 무대에 뻗어나갈 수 없다는 얘기기도 하다. 그는 디자이너 선배로서 “재정적인 문제가 있긴 하겠지만, 그에 앞서 후배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담은 브랜드를 만들고, 한국 패션에 대한 사명감을 가져야 세계에 도전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정 상무의 도전도 현재진행형이다. 올 하반기 아웃도어 브랜드 ‘캐나다구스’와 협업한 제품을 선보인다. 지난 1월 ‘2019 F/W 파리컬렉션’에서 첫 선을 보이긴 했다. 정 상무는 협업은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단다. “저는 옷을 잘 디자인할 순 있지만, 아웃도어의 전문성이 깃든 점퍼를 만드는 데에는 떨어질 수 있잖아요. 배우는 게 아직도 너무 많아요.”
강은영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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