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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이벤트도 어설프다.

입력
2019.07.14 20: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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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과 기업인의 만남은 본질적으로 이벤트다. 특히 대통령과 재벌 총수들의 공개적인 만남은 더욱 그렇다. 과거 정경유착이 어떤 폐해를 가져왔는지 명백하게 드러난 상황에서 정권이 개별 기업과 구체적인 내용의 협의를 하는 건 위험한 일이고, 삼가야 할 일이다. 설령 그런 게 필요하더라도 다양한 채널을 통해 은밀히 진행될 거라 추측할 뿐이다. 이를 수면 위로 드러내는 일은 양 측 모두에게 부담이 된다.

때문에 대통령과 기업인의 공개된 만남에선 ‘날 선 공방’ 보다는 대개 ‘좋은 말 잔치’가 벌어진다. 대통령은 첨단 산업 분야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기업을 격려하고, 기업들이 신산업 분야에 진출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힌다. 기업인들은 혁신의 성공 모델을 만들고, 기업 경쟁력을 높여 국가 경제에 기여하겠다는 다짐으로 화답한다.

이런 이벤트가 지속적으로 이뤄지는 건 정권과 기업이 서로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권은 경제 살리기와 일자리 창출에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국민들에게 보여줄 수 있고, 기업 역시 자신들의 비즈니스 활동이 국가 경쟁력과 국익을 높이는 일에 맞닿아 있다는 걸 알릴 수 있다.

실제 문재인 대통령은 기업인을 만나고 대기업의 사업장을 방문하면서 많은 덕담을 쏟아냈다. 지난해 4월 LG그룹의 연구개발 거점인 LG사이언스파크 개장식에선 “사이언스파크는 민간주도 혁신성장의 시작이자 미래”라면서 “실리콘밸리를 부러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말했고, 그 해 10월에는 SK하이닉스의 충북 청주 반도체 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반도체 산업은 한국 경제의 성장 엔진”이라고 치켜세웠다. 올해 1월엔 울산에서 열린 수소경제 로드맵 발표 행사에서 “나는 현대자동차의 수소차 홍보대사”라고 말할 정도였다. 지난 4월엔 삼성전자의 경기 화성 사업장을 찾아 “삼성의 원대한 투자 계획에 박수 보낸다”고도 했다. 물론 기업들도 대통령의 방문에 맞춰 대규모 투자 계획을 준비하고 공개했다.

이런 ‘보여주기식 이벤트’가 나쁘기만 한 걸까. 경제가 어렵고 일자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속내는 다를지라도 대통령과 기업인이 만나 소통하면서 서로 지원하고 협력하겠다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일 것이다.

한국 경제가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가 시행되자 정부와 기업인들의 만남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 7일 홍남기 경제부총리와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주요그룹 총수들을 만난 데 이어 10일에는 문 대통령과 30개 기업 총수가 만나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에 대해 논의했다. 전례 없는 비상 상황을 맞아 당장 피해를 볼 기업들을 불러 애로 사항을 듣고, 함께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필요한 이벤트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 만남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느낌이다. 기업의 의견을 듣겠다고 했는데, 막상 기업 입장에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지 않았다. 경제적 문제로 표면화됐지만 문제의 원인은 외교였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의 정치적 목적에 따른 경제 보복 조치여서 외교로 풀 수 밖에 없는 사안이란 건 우리 정부도 인정한 바다. 그런데도 시간 제한까지 두면서 총수들에게 돌아가며 한마디씩 해달라는 건 모양새도 좋지 않았다.

일본이 한국을 ‘전략물자 수출 우대국’(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겠다는 방침은 적성국가로 취급하겠다는 의미인데, 이런 전면전 수준의 갈등에 기업인들이 끼어들 틈은 더욱 없어 보인다. 간담회에서 나온 기술 자립, 수입선 다변화 등의 원론적인 대책이 더욱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다.

국가적 위기 상황을 맞아 정치권과 기업이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아야 하는 건 두 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런데 이벤트마저도 어설프게 진행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미 올해 초부터 한국의 수출입품목 조사를 마친 뒤 전담부서까지 꾸려 치밀하게 목을 조여오는 일본 정부와 비교되기 때문이다.

한준규 산업부장 manb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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